- 망월사는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주봉등의 암봉이 수려하고 빼어난 도봉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 신라 제 27대 선덕여왕8년(639년)에 해호 스님이 여왕의
명에 의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하였다.
서라벌 월성을 향해 기원하는 뜻에서 망월사라 이름하였다.
- 망월사 혜거국사부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2호 고려초기의 승려인 혜거(慧炬)의 부도로 높이가
1.8m이며 탑신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팔각원당형부도는 기단·탑신·지붕이
모두 팔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등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지대석은 3단의 괴임으로 되어 있으며 자연암반과 같은 종류의 돌로 만들어졌다.
기단부는 팔각형이며 탑신부는 둥근공 모양으로 기단에 홈을 파서 올려놓아
안정감을 준다.
부도의 앞에 배례석으로 놓인 돌의 한 면에 "혜거탑(慧炬塔)"이라고 새겨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다.
전체적인 조형감각 및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조선시대 천봉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천봉스님은 황해도 서흥태생으로 김두필의 아들이니 이름을 태흘이요,
자는 무등이다. 1793년 호국사에서 84세로 입적하니 정골사리 2과와 사리 64매를
백천호국사, 문화 월정사, 의정부 망월사 등에 탑을 세워 분장하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팔각석종형의 부도로서 기단부위에 탑신을 안치하고 옥개석을 얹은
위에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탑신석은 팔각석 종형으로 조성되었으며,
표면에 `서산오세손 천봉당태흘탑숭정기원후 삼갑인 모춘하완립(西山五世孫 天峰堂
泰屹塔崇禎紀元後 三甲寅 暮春下浣立)'이라 음각하였다. 탑 왼쪽으로 탑비가 있는데
천봉스님이 입적한 지 4년 후, 탑을 세운 지 3년 후에 건립된 것이다.
무늬가 없는 4각대석 위에 탑비를 세웠으며, 그 위에 한식기와 팔각지붕을 조각한
옥개석을 두었다.
- 망월사 천봉선사탑비
망월사 천봉당태흘탑 왼쪽으로 탑비가 있는데 천봉스님이 입적한지 4년후,
탑을 세운 지 3년 후에 건립된 것이다.
무늬가 없는 4각대석 위에 탑비를 세웠으며, 그 위에 한식기와 팔작지붕을 조각한
옥개석을 두었다.
- 회룡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681)에 의상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니
의정부지방에서는 망월사 다음으로 오래된 절이다.
그 후 경순왕 4년(930) 동진국사가 재창한데 이어 고려 문종 24년(1070)에는
혜거국사가, 고려 우왕 10년(1384)에는 무학대사가 개축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해 오다가 6.25 동란 때에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으며 대웅전, 약사전, 선실, 요사를 차례로 복원했으며, 1971년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큰법당을 신축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룡사의 귀중품은 의상대사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5층 석탑과 식수저장용으로
쓰이는 석조가 있고, 신장상을 조각한 노주가 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법성사 였는데 회룡사로 고쳐 부르게 됐다는 전설은 구구하다.
- 회룡사 5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86호 이 석탑은 단층 기단위에 오층탑신을 올린
높이 3.3m 규모의 일반형석탑이다.
지대석과 기단의 상면에는 단엽 복판의 연화문을 조각했고, 면석의 각 면에는
장방형의 구획을 나눈 후 모두 안상을 새겼다.
1층부터 3층까지는 탑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별개의 석재로 4층 이상은 탑신과
옥개석을 동일석(同一石)으로 조성했다. 탑신석의 각 면은 직사각형의 액(額)으로
삼등분했으며, 옥개석의 하면에는 각형 3단의 옥개받침을 조출했다.
회룡사는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조선 태조의 회가(回駕)를 기념해 중창이
이루어지고,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석탑은 왕실의 발원
(發願)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5세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회룡사 석조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으로 제작되었다.
이 석조는 전체 길이 224cm, 폭 153cm, 깊이 67cm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데, 현존하는 석조 중 대형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석재를 잘 다듬어 표면이 매끄럽게 처리되었고,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내곡을 이루어
시각적으로도 안정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주구의 홈과 끝 부분도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리하여 석조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서산 보원사지석조에 버금갈 만한 규모와 솜씨를 지니고 있어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규모는 물론 만든 솜씨도 뛰어나 조선시대 석조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 회룡사 신중도
회룡사의 신중도는 가로 219.5cm, 세로 176cm인 그림이다.
화면의 위쪽에는 제석천과 범천이 있고, 아래쪽에는 위태천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제석천과 범천의 권속과 팔부중이 시립한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들의 모습은 늘씬하면서도 경직된 면이 보이는 신체와 19세기 말에 유행하던
특유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의 옷은 분홍색에 가까운 옅은 붉은 색이 주조색을 이루고 있는데 군청과 녹색이
약간씩 첨가되어 19세기 후반기의 신중탱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서울 근교의 불화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는 이 신중도는 서울 동작 지장사
신중도와 친연성이 짙은 것으로 당시의 신중도 중 대표적인 예이다.
- 신라 선덕왕(632~649)때 원효대사가 한동안 이 곳에 안거하면서 수도장으로
삼았다고 하며,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 원효대사의 동상을 모시고 절의 이름도
원효사라 하였다.
1954년 주지 우일니가 재창할 당시 사지에서 불기, 수저, 기와, 구들, 동전 등의
유물이 나온 것을 볼 때 전혀 근거없는 낭설은 아닌 것 같으나 사적기록이 없어
언제 개창하였으며 그 후 무슨 연고로 멸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 원효사묘법연화경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여 사용하는 석조는 예로부터 사찰의 필수품으로 제작되었다.
이 석조는 전체 길이 224cm, 폭 153cm, 깊이 67cm의 규모를 지니고 있는데, 현존하는 석조 중 대형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석재를 잘 다듬어 표면이 매끄럽게 처리되었고,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완만하게 내곡을 이루어
시각적으로도 안정된 자태를 보이고 있다.
물이 흘러내리는 주구의 홈과 끝 부분도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리하여 석조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이 석조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서산 보원사지석조에 버금갈 만한 규모와 솜씨를 지니고 있어 서울 인근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규모는 물론 만든 솜씨도 뛰어나 조선시대 석조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된다.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6호로서 예부터 경험있는 약수로 유명한 약수선원 관음전에 모셔진 서있는 모습의 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은 1897년에 지리산 유역의 경상도 사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금분을 다시 입혔다.
그 이후에도 금분을 입혔는데, 이때 보살상에서 광무9년명다라니, 무구정광다라니경, 발원문 및 금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작은 이목구비를 한 통통한 얼굴과 간략화된 원형 귀걸이, 높게 머리묶은 모습이며, 어깨가 좁고 신체는 5등신이다.
좌협시인 동국대소장 목조관음보살입상의 복장기가 발견됨에 따라 1620년이라는 명확한 제작년대와 봉안사찰, 조각장인 및
발원지등을 알 수 있는 상이어서 조선중기의 보살상 및 조각장유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작품이다.
※ 이 상(像)을 조사하신 교수에 의하면 이와 똑같은 모습의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동국대에 소장되어 있고
복장기(腹藏記)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본래의 사찰(寺刹)이 폐사(廢寺)되면서 삼존불(三尊佛)이 흩어졌고, 현재 주존(主尊)은 소재불명(所在不明)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