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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부터1700년대 인물

조광조

정암 조광조 1482 ~ 1519 정암 조광조 1482 ~ 1519

중종(中宗)때 도학자이며 진보적 정치가,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성에서 출생하였으며 개국공신 온(溫)의 5대 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화를 입고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수학하였다. 학문은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중종10) 조지서사시(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다. 그 해 가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감찰·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되었고, 이 때부터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말이었으나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고, 조선 초기에 와서도 사장(詞章)의 학만이 높이 숭상되었기 때문에 과거에 있어서도 이것에만 치중하였고 도학(道學)은 일반적으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도학정치에 대한 주창은 대단한 것이었고, 이러한 주창을 계기로 하여 당시의 학풍은 변화되어 갔으며, 뒤에 이황·이이 같은 학자가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도학정치는 조선시대의 풍습과 사상을 유교식으로 바꾸어 놓는 데 있어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으로 조선 중종(中宗) 때 성리학자(性理學者)요, 대유학자(大儒學者)이다. 삼사(三司)를 두루 거쳐 훈구세력의 부정을 척결하는 혁신 정치이념으로 유교적 도덕국가, 요순시대의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도학(道學)에 의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훈구파가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소(疏) · 책(策) · 계(啓) 등의 상소문과 몇 가지의 제문이고, 그 밖에 몇 편의 시도 실려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의 사후에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하여 사당이 세워지고, 서원도 설립되었다. 1570년 능주에 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양현사가 세워져 봉안되었으며, 1605년(선조 38)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조광조는 젊었을 때 도봉산의 경치를 몹시 좋아하여, 심지어 조정에서 공무를 마치면 찾아가 놀기도 하였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그가 평소에 즐겨 찾던 도봉산 골짜기에 그의 인격을 흠모하는 지방유생들과 남언경목사가 건립하고 배향하였다.

송시열

우암 송시열 1607 ~ 1689 우암 송시열 1607 ~ 1689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태어나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요, 정암 조광조의 학통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았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이 많았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주자어류소분』등 다수가 간행되었으며, 사후(死後)의 문집으로는 『우암집』,『송자대전』등이 출간되었다.

안맹담(安孟聃, 1415-1462)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수(德壽), 시호는 양효, 함길도 관찰사 망지의 아들이다. 1428년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와 결혼하여 죽성군에 봉해졌고, 1432년 다시 연창군에 봉해졌다. 뒤에 연창위에 개봉되었으며, 세조 원년(1445)에는 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수록대부에 올랐다. 글씨에 뛰어나 초서를 잘 썼으며, 말 타기, 활 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수양대군과 가까이 지내기도 하였다. 사어(射御)를 잘 하였으며 음률(音律) ·약물(藥物)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안상계는 돈령도정을 지냈는데, 단종 문제로 세상이 어수선하자 저자동에 조용히 머물렀고 김종직·남효온과 친교가 있었으며 세조의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한다. 도봉구 방학동 산63번지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 ~ 1477)

정의공주는 조선의 공주로,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녀이며,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다. 세종대왕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란 정의공주는 1428년 죽산 안씨 안맹담과 결혼을 하였다. 정의공주는 한글창제에 있어 변음과 토착음에 대한 연구로 지방 사투리를 표준말로 변환, 모든 백성이 한 책을 보고 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여 세종대왕께서 특별히 상으로 정의공주에게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소설 정의공주(한소진 저) 중에서 일부 수록>

『정의는 솔직히 이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이니 마음이니 다 아름다운 우리 말인데 무엇때문에 거기에 한자의 의미를 더해야 하는가? 그냥 그대로 두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 백성들은 흥과 눈물이 많아서 행복할 때는 하늘이 떠나갈 듯 즐겁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울다가도 갑자기 힘을 내는 백성이거늘 어찌 그 마음에 악마의 음침한 기운이 들어간다 하겠는가? 백성들의 삶을 한자가 억지로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자도 어렵지만 이두는 더욱 어려워 우리 백성들은 정말 힘든 삶을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라도 우리 말을 한자로 풀이하려 들지 말고 글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을는지요?” “이두로 사람을 ‘四覽’이라고도 표현한다지요? 사방을 둘러본다는 뜻이겠지요. 그것은 아름다운 말인 듯합니다. 아름다운 말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제 생각은 한자를 빌어 이두로 쓸 때조차도 조상들은 의미에 의미를 더하느라 몹시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우리 백성의 혼은 중국인의 혼과 다르다. 정의의 말대로 우리글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치세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아바마마, 한시를 쓸 때마다 저는 참으로 답답함을 느끼옵니다. 비둘기는 구구하며 우는데 어찌 한자로 관관(關關)이라 표기해야만 하나요? 시경에 관관저구 재하지주(關關雎鳩 在河之洲)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한 쌍의 비둘기, 황하의 물가에서 노는구나----. 소녀, 귀한 종이를 밤새 구겨버리고 만 것은 마음과 글자가 합치되지 않는 남의 글로 언니 곁에 가자니 마음이 쓰라려 그랬습니다.” 라고 하자, 세종은 “정의는 낙천정에서 하늘의 뜻을 알고 천지를 감동시켜 세상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라. 과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는고?” 라고 명하였다. 우리말을 한자가 대신할 수 없다는 정의의 말은 백성들의 한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서 빨리 이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의 울림이 세종의 온 몸으로 퍼져갔다.

--- 중략 ---

이윽고 우리글 창제 선포를 앞두고 세종은 모두를 불러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우리 문자는 인간을 중심으로 음양을 다 감싸 안을 수 있는 소리글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수양도 감격에 겨워 아바마마께서 ‘ㄱ’은 하늘이 인간에게 흘러 내려오니 ‘그냥, 그대로, 그렇게’의 의미를 지닌 가장 자연스러운 글자라 하셨고 ‘ㄴ’은 땅으로부터 인간이 솟아오르니 ‘나다(生)’를 기본으로 하며, ‘ㄷ’은 사람이 땅과 하늘을 안고 있으니 ‘다함’을 뜻하고, ‘ㅁ’은 ‘ㄱ’과 ‘ㄴ’을 합쳐 완성된 ‘모두’를 의미하며, ‘ㄹ’은 하늘과 땅, 인간이 완벽하게 조화하여 ‘어우르’는 철학이 숨겨져 있다고 하며, ‘ㅂ’만 봐도 인간이 하늘과 땅을 지켜보는 형상으로 ‘본다’는 속 뜻을 갖게 되며, ‘ㅇ’은 우주를 뜻하여 어느 나라에도 없는 사념이니 이는 조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글자라 하시니 그 해석이 놀라울 따름이라며 백성들이 빠르게 우리 글자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힘차게 말하였다. 정의는 귀신도 한자는 부수와 획수가 너무 많아 학자들도 다 배우지 못하나 우리글은 가로선과 세로선, /와 \, ‘ㅇ’그리고 ‘․’ 등 여섯 개의 모형만 있으면 만 가지도 넘는 무궁무진한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것으로 모든 말을 다 표기할 수 있으니 가히 귀신도 알아볼 글자가 아닌가? 모두 세종께서 음운과 음성학뿐 아니라 하늘과 땅, 인간을 우리 문자에 적용한 덕분으로 모든 글자를 소리내어 말할 수 있으니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누구든, 천지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일이라 하면서 감격, 또 감격하였다. 그로써 모든 일이 끝났다.』

이인(李仁, 1465 ~ 1507)

자는 자정(子靜)이며, 세종의 9남 영해군의 아들로, 1474년 영춘군(永春君)에 봉해졌다. 연산군 때 아들 완천부정(完川副正) 기(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하였으며, 그는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특히 상례(喪禮)를 잘하여 종친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묘는 도봉산 기슭 무수골(도봉1동 산 82-1)에 있다. 이 곳은 그의 부(父)인 영해군의 묘와 그의 동생인 길안군 및 아들인 완천군과 강녕군의 묘가 같이 있으며 현재 이 마을에는 영해군의 후손들이 이 고장을 지키고 있다. 신도비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남언경(南彦經, ?-?)

본관 의령(宜寧). 호 동강(東岡).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에 기용되고, 15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15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요(李瑤)와 함께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이황(李滉)을 비판했다는 주자학파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양주목사 재임시 1573년(선조 6) 도봉산 영국사 절터에 도봉서원(道峯書院)을 창건하였다.

유희경(劉希慶, 1545~1636)

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천인으로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았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하루도 떠나지 않고 시묘(侍墓)하고 편모를 극진히 공양했다.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남언경에게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았다.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일러주었으므로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하사받았다.

광해군 때에 이이첨(李爾瞻)이 모후를 폐하려고 그에게 소(疏)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그 절의를 칭송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주었고, 80세 때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제수받았다. 그는 한시를 잘 지어 당시의 사대부들과 교유하였는데 당시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고,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이 사액을 받은 곳으로 1623년에 도봉서원 옆 영국동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말년에 시를 지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다. 뒤에 아들 일민(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漢城判尹)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촌은집》 3권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촌은 유희경과 매창이야기

  • 서러운 만남
    동인과 서인의 정쟁은 극에 달했다. 1591년 이른 봄,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은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과 전운이 감도는 나라를 걱정하며 또한 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상이나 사대부상에 자주 불려 다니며 상례를 집행하던 중인의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역시 그를 기방(妓房)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침류대를 중심으로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 시단을 이끌었던 위항문학의 선구자 유희경은 천리길을 내려와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만났다. 당시 나이 마흔여덟 살의 유희경은 스물의 기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서울에서부터 매창에 대해 들어 왔는지라 스물여덟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촌은과 매창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촌은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증계량(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를 바쳤다.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의 계랑이라는 이름 들었는데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싯구와 노래솜씨 서울에까지 진동했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무산 신녀가 삼청(三淸)에 내려온 듯하여라

    열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매창은 이미 서울까지 알려진 기생 시인이었다. 촌은은 매창을 무산의 신녀에 비유하면서 극찬하고 있다. 초회왕이 무산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꿈 속에 신녀가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는 시집도 가기 전에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한다. 그 신녀가 도가에서 말하는 신선이 사는 삼청인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 내려온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 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 옥협빈) 고운 얼굴에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심 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은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 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촌은 유희경은 「희증계랑(戲贈癸娘,)」이라는 칠언절구로 신선의 세계에서 깨가 쏟아지는 즐거움을 그리고 있다. 이들에게는 세속의 체면이나 권위는 필요치 않았다. 둘 간의 사랑과 시를 통한 화답이 얼마나 절정했으면 이 고장 출신의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이라고 하였다. 황진이, 송도삼절이라 불리는 서경덕, 박연폭포처럼 말이다.
  • 이별 그리고 그리움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400여 년 전 애절한 별리를 노래했던 연인들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또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러움을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부안 기생 매창은 한시에 능했을 뿐 아니라 거문고 연주도 매우 뛰어났다. 배꽃이 푸른 하늘에 비처럼 떨어질 때 이별한 님이 가을이 짙어가도 소식 없으니 그이도 나를 생각하기나 하는지 애절함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한 수절가는 애절하기만 하다. 쓸쓸한 가을밤에 들려오는 거문고 가락이 더욱 시렸으리라.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졌다. 촌은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었다.
    매창은 촌은과 헤어진 동안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님에 대한 그리움의 한을 노래했다.

        春冷補寒衣(춘빙보한의)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珠淚滴針絲(옥루적침사)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

    매창의 시「자한(自恨)」에서는 유희경이 떠나고 없는 봄은 너무나 추워 추울 때 입던 옷을 다시 꺼내어 수선하면서도 그리운 마음에 바느질이 되지 않아 눈물만 흘리는 서러움이 진하게 베여 있다.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워 글을 쓰자 하나 / 글을 쓰기도 전에 눈물이 가득하구나’ 마치 남해로 유배온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 생신날 지은 「사친시(思親詩)」를 연상하게 한다. 유희경 역시 전쟁 중이라 만나지 못하는 매창을 그리워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하지만 보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에 비내리면 애가 끊기는구나

    촌은은 「회계랑(懷癸娘)」에서 서울과 부안이라는 천리길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오동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애가 끊기는 고단한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은 촌은집에 여러 편 실려 있다. 「도중회계랑(途中懷癸娘)」에서는 가인을 이별한 후 남쪽 하늘이 막혀 떠도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과 파랑새마저 소식을 전하지 않음에 벽오동에 떨어지는 찬비소리 들려 차마 견디지 못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아내 외에는 단 한 번도 마음을 준 여자가 없었던 유희경, 기방 출입도 자제했던 그가 스물여덟이나 어린 매창에게 빠진 것은 둘 다 시대를 초월한 시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들은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전쟁으로 인한 이별 후에도 사랑의 노래를 천리길 머나먼 곳으로 주고 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이별해야 했던 두 연인은 15년만에 다시 만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부안으로 달려가야 했을 유희경이 왜 서울에 남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무살의 꽃다운 처녀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독수공방 시킨 촌은의 심사는 무엇이었을까. 그 긴 청춘을 매창은 수절해야 했다. 기생이라는 신분임에도 정조를 지킨 그녀의 심사는 또 무엇인가. 전쟁이 끝난 후 매창은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지만 오로지 마음을 받친 늙은 시인만을 그리움으로 간직한 것이다.
  • 15년만의 재회와 매창의 죽음
    1592년 이별했던 촌은과 매창은 1607년 15년 만에 다시 만난다. 그 긴 세월 매창의 애간장을 녹였던 촌은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났지만 매창은 더 없는 사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유희경은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 만이라도 시를 논하면서 재회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당나라 시인 두목]은 어인 일로 이리도 더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가는 것은 꽃향기 찾아가는 뜻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오로지 시를 논하자던 10일의 약속을 좇음이라오

    칠언절구「중봉계랑(重逢桂娘)」은 환갑을 지난 촌은 유희경이 매창과의 어렵고도 중요한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다시 만남이 기녀 매창의 육체적 관계가 아닌 문학을 논하기 위해서라고 단정하고 있다. 15년 전 매창은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더 머물며 시를 논하자고 애원한 적이 있었다. 촌은은 그 약속을 핑계로 재회하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사랑이 샘솟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시를 핑계로 삼을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기약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3년 후인 1610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촌은은 매창의 부고를 듣고 애도의 시인 「도옥진(悼玉眞)」이라는 칠언절구를 읊는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히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다만 배나무 정원에 한 곡조 남아 있어
        王孫爭設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매창의 죽음을 끝내 잊지 못해 양귀비의 이름을 빌려 지은 시이다. 이원(梨園)에서 현종을 모시고 예상우의곡을 연출하던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 그것은 바로는 현종과 양귀비[양옥진]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노래였다.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다시 촌은이여, 매창이여
    남해 용문사에 소장된 『촌은집책판』에는 천민 출신의 위대한 시인 촌은 유희경과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는 버금가는 조선 최고의 여류시인 이매창의 사랑노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유희경은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정업원 아래 있던 자기 집 시냇가 흐르는 개울가에 있는 바위를 침류대라 하고, 이곳에서 이름있는 문인들과 시로써 회답하였다. 그는 북악단풍 등 20경을 시로 지어 읊기도 하였으며,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한 시집 『침류대시첩』을 펴냈다. 그는 당시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했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여 위항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유희경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도봉서원을 건립하고 남언경이 사액을 받은 곳으로1623년에 도봉서원 옆 영국동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말년에 시를 지으며 도봉서원 앞 계곡에서 풍류를 즐겼으며, 계곡에는 암각글자가 새겨진 14개의 각석군이 분포하고 있다. 이 곳은 도봉산 계곡 중에서 경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곳으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겹쳐있던 침류를 이름 그대로 맑은 시냇물을 베게 삼아 누워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또한 남언경으로부터 문공가례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을 집례하면서 이름이 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켰으며 광해군 때 이이첨이 폐모의 소를 올리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와 절교하였다. 인조반정 후 왕은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가의대부로 승진시켰다. 문집으로 『촌은집』, 저서로 『상례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