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1887∼1964)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의병과 독립운동가로 활동했고, 광복 후에는 우리나라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 발전을 위하여 애썼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독재와 맞서 싸운 영원한 민족지도자였다. 도봉구와의 인연은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제한받자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으로 은둔하면서 맺었다.
그는 담양 용추사(龍湫寺)에서 항일운동가 최익현의 열변에 감동을 받은 뒤 1906년 동지들을 모아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면서 항일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의병투쟁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되자 계몽·자강운동으로 눈을 돌리고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15년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가 3·1 운동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잠시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를 거쳐 변호사로 개업했다.
이때부터 김상옥 의거(1923년), 6·10 만세운동(1926년), 간도 공산당사건(1928년), 원산파업사건(1929년), 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1932년) 등의 ‘시국 사건’에 무료 변론을 맡아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앞장서 직접 항일운동에 나서기도 했고,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北風會)에도 관여했다.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했고, 미 군정청의 사법부장 등을 맡아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1, 2대 대법원장을 지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법조협회 회장을 맡아 사법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재야 법조인이 되어서는 이승만 독재에 맞섰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종식을 촉구하면서 야권통합을 추진하기도 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됐다.
그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4년 창동리로 이주하여 집을 짓고, 논을 장만해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 해방 2년 전에는 닭 1,500마리를 키웠으나 사료를 구하려면 일본 관리에게 아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닭을 모두 처분해 버렸다.
김병로가 창동리로 이주하자 홍명희, 정인보, 송진우도 따라 창동리로 이주해 창동은 독립운동가들의 은거지가 됐다. 일제는 이들 ‘요시찰(要視察)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양주경찰서에 고등계를 설치했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함께 산 김병로, 송진우,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고 불렀다.
송진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1890∼1945)는 중앙학교 교장으로 3·1 독립운동의 기틀을 닦았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과 언론을 통한 민족지도자였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중앙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1918년 말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김성수, 현상윤, 최린, 최남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일 방안을 논의했고, 1919년 3·1 운동으로 결실을 보았다. 3·1 운동을 주동한 48인의 한 분으로 며칠 뒤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이후 1940년 폐간될 때까지 20여 년간 사장, 고문, 주필 등을 역임하면서 압제를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민족의 대변지’로 이끌었다.
《동아일보》를 통해 민립대학설립운동(1922년), 물산장려운동(1923년), 동포위문 활동(1923년),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1931~1935년) 등을 통해 줄기차게 민족자강운동을 폈다. 국내외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연결하고 자금지원을 하거나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국내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역할을 계속했다. 또한 단군,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의 위업을 널리 알리고자 삼성사 건립을 시도하고(1917), 아산 현충사를 중수(1931) 했으며, 평남 강동의 단군릉을 보수했다(1934).
동아일보 사장으로 있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신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보도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킨 언론인이었다.
광복이 된 뒤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면서 여운형, 박헌영 등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다. 국민대회준비회와 환국지사후원회를 결성하여 건국 준비를 하였고, 한국민주당 창당 시 대표 격인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반탁을 강력히 주장한 임시정부 요인들과는 달리 ‘신중한 반탁론’을 펼치다가 1945년 12월 30일 한현우 등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가 김병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창동(옛 경기도 양주군)에 정착하자 송진우도 창동리 281-1(현재 삼풍유치원 부지)에 직접 한옥을 짓고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살았다. 사람들은 함께 창동에 살던 송진우, 김병로, 정인보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
정인보
‘광복절 노래’와 ‘삼일절 노래’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1893∼1950)는 독립운동과 국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학자였다. 양명학(陽明學)의 대가인 이건방에게 사사(師事)한 뒤 1911년과 1912년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이회영 형제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났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1913년에는 중국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비밀결사인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고 광복운동을 벌였다.
그러다 부인이 첫딸을 낳은 뒤 숨졌다는 비보를 듣고 급히 귀국했고, 이때부터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다. 나라 잃은 슬픔까지 조복으로 나타낸 독립 염원이었다.
1923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전임이 되어 한문학과 조선문학을 강의했으며 《동아일보》와《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과 대표 저술인《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을 펴냈다. ‘오천년간 조선의 얼’ 등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해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에 따라 조선어강좌가 폐지되자 1938년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전북 익산군에 은거했다. 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국학대학(國學大學) 초대학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으나 이듬해 임영신 장관의 독직 사건을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어 물러났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 31일 서울에서 납북됐는데, 9월 7일 황해도에서 폭격 피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 8월 창동리(현재의 쌍문동)로 이주했다. 그의 옛집은 사랑방이 딸린 규모가 있는 초가였다.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로 일제강점기에 함께 창동에 살던 정인보, 김병로, 송진우를 ‘창동의 세 마리 사자(獅子)’라 불렀다.
함석헌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여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 교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이승훈·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사상가, 민권운동가 겸 문필가. 광복 후, 신의주 학생 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 군부세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영향을 받았고 1970년 4월『씨알의 소리』를 창간,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으며, 1976년의 명동사건, 1979년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많은 탄압을 받았음.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주요 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쌍문동 81-78번지 함석헌 옛집은 함석헌의 차남 함우용씨 부부가 1978년부터 살던 집으로 1982년부터 타계하는 1989년 2월까지 거주하였다.
계훈제
1921년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출생하였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 1학년 재학 중 일제의 학병 징집을 거부하다가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된 뒤, 평양 인근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민족해방협동단에 가입해 항일활동을 하였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3차례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80년에도 김대중내란음모사건(김대중 재판)에 연 루되어 15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하였고,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당한 고문 등으로 얻은 폐질환이 악화되면서 1995년부터 투병 생활을 하던 끝에 1999년 3월 사망하였다
그는 1990년 5월 도봉구 방학동 612-30번지로 전입하여 타계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홍명희
홍명희는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1910년 일본 도쿄다이세이중학〔東京大成中 學〕을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 오산중학교 교장, 연희전문학교 교수 를 거쳐 24년 동아일보〉편집국장을 지냈다
27년 신간회(新幹會)를 창립하고 부회장이 되는 등 친일을 거부하여 옥고 를 겪었고, 20년대 초부터 유물론 철학과 민족주의에 관심을 가져 각종 민 족 해방운동에 참여하였다.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명성을 얻었고, 광복 뒤 좌익계열의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이 되었으며 48년 남북연석회의 한국 대표였으나 북한에 잔류하여 49년 부총리, 61년 조국평화통일 위원장을 지냈다.
홍명희는 1939년 솔가하여 창동리 244-1번지로 이주하였으며, 궁핍한 생활에서도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고, 1944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으로 다시 옮겨 가기 전 5년여를 창동에 거주하였다.
전형필
전형필의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이고, 태어난 곳은 종로4가 112번지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던 전형필은 휘문고보 졸업 이후에도 자주 찾아 뵙던 휘문고보 시절 미술교사 였던 고희동으로부터 “왜놈들 손으로 넘어가는 우리 서화와 전적을 지키는 선비가 되라”는 당부를 듣고, 오세창을 소개받는다. 3ㆍ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이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ㆍ1864~1953)은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그림을 수집해 엮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근역화휘’(槿域畵彙)를 전형필에 보여주었다.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는 우리민족의 혼임을 역설하면서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우리 문화를 보는 눈을 키울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전형필에게 산골물 ‘간(澗)’자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한도를 그리면서 인용한 <논어>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에서 따온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송(松)’자를 합해 간송(澗松)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오세창에게서 사사받으며서 서화수집과 감식을 배운 간송 전형필은 1932년 백두용이 인사동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고서화와 문화재를 수집했다. 특히 백두용으로부터 <조선실록>에 기록된 ‘훈민정음’ 관련 책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평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자신이 태어난 집인 종로4가 112번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급서했다. 향연 57세 유족으로 미망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장지가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으며, 북단장에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설립되어 미술사를 연구하고 있다.
간송 전형필의 장지인 ‘양주군 노해면 창동’이 오늘날 번지수로 하면 도봉구 방학동 429~431번지에 해당한다. 여기에 간송 전형필의 묘소와 1910년대 지어진 한옥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노해면 창동리에 간송 전형필 소유의 많은 땅과 논이 있었고 마들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곡식 창고가 노해면사무소에 인접해서 있었다.
김수영
종로 관철동 58-1에서 태어났으며 효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1942년 동경상대전문부에 입학 1943년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여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1952년까지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창동으로 이사하여 1956년 마포 구수동으로 분가한 이후에도 어머니와 도봉동 본가에서 양계를 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시절 살았던 종로6가집, 구수동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한 곳도 없으며, 도봉동 본가만이 시인의 체취를 맡아 볼 수 있는 곳으로 남아있다.
김수영은 치열한 저항정신과 새로운 형식으로 자유와 삶을 노래한 시인이며,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통해 활약한 해방 이후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이다. 그의 시와 문학적인 표현들은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상징적 가치를 갖게 되었으며 ‘자유’는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예민한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시『풀』은 1968년 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그의 마지막 작품(1968.5.29.)이자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대표시로 『달나라의 장난』(1959년 간행), 『거대한 뿌리』(1974년 간행) 등 시집과 평론집 『시여 침을 뱉아라』(1975년 간행), 기타 번역서 등이 있다. 1981년 6월『김수영 시선』출간(지식산업사), 9월 『김수영 전집 1-시』, 『김수영 전집 2-산문』출간(민음사).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하였다. 2001년 9월 최하림이 쓴 『김수영 평전』(실천문학사)이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도봉산 도봉서원 아래쪽인 도봉동 산 107번지에 김수영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시비 앞면에는 대표시 『풀』이 새겨져 있다(아래 사진). 2013년 11월 27일 구(舊) 방학3동 문화센터 자리(해등로82길 30)에 김수영문학관이 개관하였다.
전태일
1948년 대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끝없는 노동과 방황을 겪은 노동 자이다. 1964년 16세 때 평화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여 열악한 작 업환경 속에서 꼬박 3년을 보내고 미싱사, 재단 보조 등을 거쳐 오랜 소원이던 ‘재 단사’가 되었다. 그는 이런 고단한 노동과 절박한 가난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중고등통신강의록』을 사서 보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와 열악한 노동환경·임금문제·기업주의 횡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라는 책을 빚을 내서 구입하여 열심히 읽었다. 1968년 말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매주 한번씩 평화시장 부근 다방에서 10명 정도의 재단사들과 모임을 갖고 1969년 6월 ‘바보회’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바보회의 소문이 퍼지자마자 해고되어 평화시장에서 쫓겨나게 되고 막노동판을 떠돌다가 1970년 9월 다시 재단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옛 바보회 사람들과 함께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노동청에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냈다. ‘11시간 작업, 일요일 휴무, 정기 건강진단,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등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자살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의 분신은 흔히 한국 노동운동을 10년 이상 앞당겼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가 청계천에서 근무하던 시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8시에 출근하여 밤 11시 마지막 버스에 맞춰 퇴근하던 그의 보금자리는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였으며, 1985년 재개발되어 현재 쌍문동 삼익세라믹아파트 112동에 전태일 열사 동생 전태삼 가족이 살고 있다. 이 곳이 전태일 열사 옛집 자리였다고 한다.
문예봉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끝에,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유랑극단에 흘러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무성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을 맡아 나운규와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가 조선에서 최초로 제작된 발성영화 <춘향전>이었다.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는 17살인 1933년에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문예봉은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선동하는 어용 영화에 대거 출연함으로써 친일 행위에 가담했다. 남편 임선규가 1936년 7월에 내놓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일명 홍도야 울지마라)가 서대문 충정로 동양극장에서 빅히트를 했다. 이로 인해 임선규는 난생처음 얼마간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어 경성 교외에 아담한 집 한칸을 마련했다. 이것이 배우 문예봉의 집으로 쌍문동에는 1937년부터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차미리사
독립유공자, 덕성학원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 그리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한 민족의 지도자요, 통일운동가이며, 여성 교육의 선구자였다.
- 1. 출생과 출가(∼17세)
- 차미리사는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의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다.
- 2. 외국 유학(23∼34세)
- 자유와 민권사상이 질풍과 노도처럼 조선에 밀려오는 20세기 초, 차미리사는 스물셋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때 남겨두고 온 어린 딸과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외국어를 배우며 고학하느라 심신이 지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신학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
- 3. 배화학당 교사(34∼42세)
-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912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천했다. 차미리사는 3.1운동이 발발한지 일주년이 되던 해, 민족의식이 강한 배화학당 교사들과 교류하면서 배화학당 여학생들의 3‧1운동 일주년기념 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새벽, 그의 조카 이수희를 비롯하여 그의 지도를 받은 기숙사 학생들이 3‧1운동 일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벌였다.(이 사실은 문재인 대통령 2019년 8.15 광복절 연설문에서 언급. 그리고 이 때문에 2020년 3.1절 101주년 행사를 배화여학교에서 개최하였음) 배화학당 여학생들의 3․1운동 일주년기념 만세시위 사건을 계기로 차미리사는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독자적인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 4. 3.1운동 발발과 민족교육(42∼62세)
- 1) 조선여자교육회 창립과 부인야학(42세)
1920년 4월 19일 조선여자교육회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립적, 자생적, 자각적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차미리사는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주 교육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적령기 학생들이 아니라 여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이었다.
- 1) 조선여자교육회 창립과 부인야학(42세)
- 2) 전국순회강연 활동과 근화학원(43∼45세)
- 차미리사는 순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84일간, 67고을, 만여 리를 순회하면서,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낡은 사상 타파, 생활 개조, 여성 교육, 여성 해방, 남녀평등, 신문화 신사상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전국순회강연회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부인야학강습소의 이름을 민족의 꽃 무궁화를 뜻하는 근화학원이라 하였다.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운동을 벌인 결과로 세운 근화학원은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체였다.
- 3) 실업교육(46세∼62세)
- 1925년 근화여학교로 승격되었으며, 차미리사는 교육이념을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로 삼아, 근화의 학생들에게 주체성과 자율성, 사고의 창조성, 지식의 실천성 등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차미리사는 1934년 재단법인 근화학원을 설립하고 1935년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인가받아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실제적인 교육을 실천했다. 근화여자실업학교는 1938년 일제의 압력으로 민족성을 상징하던 무궁화인 근화의 교명을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 4) 일제 압력으로 사퇴(62세)
- 1930년대 후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제는 차미리사가 민족사상을 품은 교육자라는 것을 문제 삼고 차미리사에게 교장 자리에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교장직을 박탈하려한 것이었다. 그는 1940년 8월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나이 62세 되는 해였다.
- 5. 통일운동(62∼77세)
-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차미리사의 열정은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차미리사는 1947년 3월 1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최한 삼일절 기념식 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허헌(許憲, 1885~1951), 박헌영(朴憲永,1900~1955), 김원봉(金元鳳,1898~1958), 여운형(呂運亨, 1886~1947), 김창준(金昌俊, 1889 ~ 1956), 김기전(金起田,1894∼1948), 유영준(劉英俊,1890~?)과 나란히 임시의장에 선임된다. 이는 차미리사가 대한민국 여성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어 조국이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또는 통일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에 서있던 1948년 4월, 독립운동가, 문학인, 학자, 언론인, 법조인 등이 모여 민족적 자주 독립의 운동을 성원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충정을 밝혔다.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차미리사도 기꺼이 동참했다. 일생을 민족의 예속과 분단에 맞서 해방과 통일을 위해 노력한 차미리사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고 유언 남기고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6. 독립운동가로 서훈(2002년)
- 차미리사는 2002년, 광복 57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되었으며,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차미리사를 ‘여성교육의 선각자’로 수록하여 차미리사의 업적과 정신을 한국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현재 차미리사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 산 278-1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도봉구에는 차미리사가 세운 근화학원을 뿌리로 하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덕성여자대학교에는 덕성여대 뿌리찾기의 결실로 민주동산에 세워진 차미리사 동상과 차미리사 기념관이 있으며, 설립자의 교육이념을 현재 대학의 창학이념을 삼아 여성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참고자료: 한상권, 『차미리사 평전』, 푸른역사, 2007)
- 차미리사는 2002년, 광복 57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서훈되었으며, 현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차미리사를 ‘여성교육의 선각자’로 수록하여 차미리사의 업적과 정신을 한국 근대 여성교육운동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현재 차미리사선생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 산 278-1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도봉구에는 차미리사가 세운 근화학원을 뿌리로 하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덕성여자대학교에는 덕성여대 뿌리찾기의 결실로 민주동산에 세워진 차미리사 동상과 차미리사 기념관이 있으며, 설립자의 교육이념을 현재 대학의 창학이념을 삼아 여성교육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