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연산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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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번호 : 국가사적 제362호
- 위치 : 도봉구 방학로17길 46
- 지정일 : 1991.10.25.
연산군묘는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 부인 신씨(居昌郡 夫人愼氏)( ? ∼ 1537)의 무덤이다. 연산군은 성종 7년(1476)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휘(諱)는 융(隆)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尹氏)이다. 성종 14년(1483) 2월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성종 25년(1494), 12월 성종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연산군은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의 침입에 대비하여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제조하고, 변경지방으로의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 혹은 《국조보감 國朝寶鑑》,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등의 수정 같은 활약도 있었지만, 크게 잘못된 정치를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연산군 4년(1498)에는 《성종실록》 편찬 때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고, 1504년에는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사건을 문제로 삼아 많은 사림학자들을 희생시킨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이러한 실정(失政)과 성품이 광폭함으로 인하여 연산군 12년(1506) 9월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는 중종반정(中宗反政)을 당하여 왕위에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江華) 교동(喬洞)에 추방되었다가 그해 11월 31세로 병사하여, 그 곳에 장사지내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연산군은 비록 왕을 지내었으나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무덤을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의 부인 거창군 신씨는 영의정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며, 성종 19년(1488)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과 함께 폐출,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정청궁(貞淸宮)에서 거처하다가 중종 32년(1537)에 별세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서울초안산분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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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정번호 : 국가사적제440호
- 위치 : 도봉구 창동 산 202-1
- 지정일 : 2002. 3. 9.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은 양반분묘에서 서민 민묘까지 다양한 계층의 무덤 1,000기 이상과 상석, 문인석, 비석, 동자상 등 수백여 기의 석물들이 있는 곳이다.
15세기 이래 서민, 중인, 내관, 상궁,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각종 문관석과 동자상 등이 시기별로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내관의 분묘가 많은데 그 중에는 17세기 내관이었던 승극철 부부의 묘와 비석이 있어 내관의 생활사 연구에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여러 계층의 분묘가 집중적으로 섞여 있는 곳은 흔치 않은 예로 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은 특정계층의 분묘를 비롯해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무덤을 조영하여 묘제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남아 있는 문인석, 동자상 등 석물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여 석물변천사 연구에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