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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향토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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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리 석조이정표

  • 지정번호: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1호
  • 위 치: 도봉구 창동 254
  • 지 정 일: 2017. 12. 21.
  • 조선시대 양곡창고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창골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창동리’는 조선시대 마을이름이다. 창동리 석조 이정표는 창동 초등학교 옆 공터에 옛날부터 있었으나 오랜 풍화작용으로 창동리라고 음각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994년 서울 600년 기념사업으로 서울의 명소 267번으로 지정되기도 했던 창동리 석조 이정표는 창동지역의 옛 이름을 새긴 이정표로서 그 의미가 있어 도봉구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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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림 묘

  • 지정번호: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2호
  • 위 치: 도봉구 쌍문동 산83-18
  • 지 정 일: 2017. 12. 21.
  • 조선 초기 문·무신으로 태종 때 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죽은 후에 좌의정에 추증된 이회림(李懷林, ?~1451)의 묘이다. 부친 이종무는 조선 개국 원종공신이며, 아들인 저헌 이석형은 세종 때 조선에서 처음으로 3과에 장원(생년과, 진사과, 식년문과)을 하였으며, 한성판윤으로 재임되어 가장 오랫동안 임무를 수행하였다. 묘는 문종 1년(1451) 처음 조성되었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에 훼손되어 후손이 재정비하였으며, 모표와 문인석도 이때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묘는 정경부인 박씨와 위아래에 조성되어 있고, 그 위에는 부친 이종무의 단이 자리하고 있다. 묘의 위치와 배치에 관한 사항은 조선시대 한문 4대가인 월사 이정귀의 월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와 석물들로 보아 조선 초·중기 묘역의 특징을 알 수 있으며 관리가 잘 되어 도봉구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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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목사 선정비(善政碑)

  • 지정번호: 도봉구 향토문화재 제3호
  • 위 치: 도봉구 방학로3길 117(쌍문동)
  • 지 정 일: 2017. 12. 21.
  • 조선시대 양주지역(도봉구, 노원구, 강북구, 양주시 등)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지방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세운 비이다. 쌍문동에 위치하고 있는 선정비 4기는 조선 영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건립되었는데, 이중 1903년(고종 40)에 세워진 홍태윤의 비는 목사가 아닌 군수로 표시되어 있어 20세기 전후하여 양주가 행정적으로 재편되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 옛날 양주지역의 일부였던 도봉구에 그 당시 세운 지방관의 선정비가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도봉구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 이여적(李汝迪) 양주목사 선정비
이여적 양주목사 선정비 앞면에는 ‘牧使李公汝迪永世不忘碑(목사이공여적영세불망비)’, 뒷면에는 ‘雍正十三年乙卯正月日立(옹정십삼년을유정월일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雍正十三’은 1735년(영조11)이다. 황해 수사, 곡산 부사, 장단부사를 역임하던 이여적은 1728년(영조4) 경상도에서 난이 일어나자 경기방어사 자격으로 병사를 이끌고 내려가서 경상우병사가 되어 난을 토벌하였다. 1732년(영조8)에는 양주목사가 되어 1735년(영조11)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그 뒤 풍덕 부사 등을 역임했다.

2. 임한수(林翰洙, 1817∼1886) 양주목사 선정비
임한수 양주목사 선정비에는 ‘牧使林公翰洙(목사임공한수)’라고 씌여져 있다. 임한수(林翰洙)는 1864년(고종1) 3월부터 1869년(고종6) 6월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병조참판, 공조참판, 이조 참판, 경주 부윤, 의주 부윤, 강원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생애 마지막 관직은 1886년 임명된 공조 판서였다. 1891(고종28) 고종으로부터 ‘효정(孝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3. 이봉의(李鳳儀, 1839~1919) 양주목사 선정비
이봉의 양주목사 선정비 앞면에는 ‘牧使李公奉儀愛民善政碑(목사이공봉의애민선정비)’라고 씌여져 있다. 이봉의(李鳳儀)는 1868(고종5)에 관직에 나와서 1869년(고종6) 5월 2일부터 5월 16일까지 2주간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이후 한성부 우윤, 충청도 병마절도사, 춘천 부사, 좌변포도대장, 한성부 판윤, 중추원 일등의관, 강원도 관찰사, 국방부 장관격인 군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완성군(完城君)으로 불리웠다.

4. 홍태윤(洪泰潤) 양주군수 선정비
홍태윤 양주군수 선정비 앞면에는 ‘郡守洪公泰潤愛民善政碑(군수홍공태윤애민선정비)’, 후면에는 ‘年 癸卯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癸卯’년은 1903년 이다. 홍태윤 양주군수 선정비는 홍태윤이 양주군수로 재직 중에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홍태윤은 1885년부터 궁성 호위를 맡았다. 임오군란이 나던 해 통위영 영관(統衛營領官)으로서 궁성을 호위하던 홍태윤은 명성왕후가 왕궁을 탈출하는데 공훈을 세워 포천 현감으로 영전하게 된다. 이후 영평 군수, 진위 군수를 거쳐 1902년(고종39) 2월 양주 군수로 임명된다. 홍태윤은 고종이 퇴위되던 1907년 7월까지 양주군수를 역임해 조선왕조 마지막 양주 목민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홍태윤은 무관 출신 거구로서 타고 다니던 말의 허리가 가끔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목민관으로 훌륭한 선정을 펼쳤다고 해서 일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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