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문동 효자이야기
지금의 쌍문동에 250여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자, 효부이야기가 있다. 남궁 지(南宮 遲)는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기를 남과 달리 정성을 다하였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고 부친의 대변을 혀에 대고 병세를 살폈다고 전한다. 그리고 남궁 지의 처(妻) 하동 정씨는 출가할 때 의장과 경대를 하인이 돌아가는 길에 친정으로 되돌려 보내고 말하기를"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공양에 손색을 입게 하리요"라고 하였다. 또 시댁에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지극 정성으로 시아버지가 2년간 병환으로 누워 계실 때 정(鄭)씨는 해산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항시 시아버님 곁에서 시중하였다고 한다. 아들 남궁 조는 암회리(현 방학동)에 살면서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고 밤에는 북두칠성을 향하여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축원하였으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렸다고 한다. 남궁 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 내외와 그의 아들 남궁 조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문 쌍문(雙門)을 세우게 되었으며(1893년 교지) 현재 쌍문동(雙門洞)의 동명(洞名)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방학동 하마비
도봉산 방학동에는 하마(下馬)들(野)이 있다. 예전에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 하여 생겨난 지명이다. 하마비는 대개 비석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 누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다. 왕을 비롯하여 훌륭한 어른과 관련이 있는 곳에 하마비를 세워 그 어른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하마들 뒷산에 덕수이씨 묘가 많은데, 조선시대 3대 정승이 살았다고 한다. 세도가 상당하여 가족이나 일가 친척은 물론 그 집에서 부리는 남녀 하인들도 위세가 당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집 앞에서는 누구나 가릴 것 없이 타고 있던 말에서 내리게 되었고, '하마(下馬)'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방학동에는 또 하나의 하마들 이야기가 있는데, 폭군 연산군 묘에 있었던 하마비이다. 비록 왕에서 쫓겨났으나, 왕을 지냈으므로 하마비가 세워졌다고 전한다. 연산군 묘가 있던 앞들을 역시 하마평(下馬坪)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방학동 용바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천주교 공동묘지 자리는 이전에 용바위가 있었다. 펑퍼짐한 큰 바위로 한 가운데에 1m 정도가 파여 있었는 데, "여기서 용이 올라갔다.“, ”용이 살다가 하늘로 등천할 때를 기다리는데 기회가 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고 또 걱정을 하였다."라는 말을 마을 어른들이 하면 아이들은 “여기는 용이 살만한 큰 물이 없는데, 어떻게 살았을까?”라고 아주 궁금하게 여기곤 했었다. 그러면 어른들은 "용은 꼭 물에만 산 것이 아니라 산에서도 살았다.“, ”풍수지리로 볼 때 산등성을 용이라고 한다.“, ”용이 꿈틀꿈틀 하면서 아래로 내려온 것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라고도 하였으며, “용이 육지에서 올라갈 때는 큰비가 오는 날이다.”, “구름이 새까맣게 낮게 몰려들고 비가 오면 숨어 있던 용이 그 구름 속으로 쑥 올라간다.”, “올라가면서 꼬리로 바위를 치고 올라갔기 때문에 용바위가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천주교 공동묘지가 조성되면서 이 용바위를 없애 버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