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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 도봉동문 道峯洞門
  • 작성자 : 이○○ 조회 : 245
  • 작성일 : 2019.05.28
  • 도봉동문.jpg

    새해 첫날,도봉산 계곡을 다녀오면서 남기고 싶은 소회(所懷)


    도봉동문*道峯洞門 / 이중근

    열고 들어서니,

    우암尤庵 선생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발길 뜸해진 골짜기에는
    선현들의 숨결이
    향처럼 피어오른다

    삼전도三田渡의 그날을 잊지 말자던
    도봉산 계곡의 목쉰 물소리

    다람쥐도 아는 양,
    쪼그린 채 조막손을 비벼댄다





    *도봉동문道峯洞門: 도봉산 입구임을 알리고,

    도봉서원의 전당에 들어 섬을 알리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 글자를 새겨 놓은 바위



    [송시열 宋時烈]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하 생략-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 최대의 치욕]

    1636년 12월 2일,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침공한다.이에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할 수 없이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조선은 결국 1월 30일 항복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된다.
    수항단에 나아가 삼배 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행동) 라는 항복의 예를 행했고, 예가 보이지 않는다며 계속 다시 하라는 호령에 수차례 땅에 머리를 찧어 피가 흘러내렸다.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대신들과 왕자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한다. 일국의 왕이 행한 치욕적 항복으로 길이 길이 지울 수 없는 아픈 역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출처] 민족 최대의 치욕의 유산 ㅡ 삼전도비 (달콤한 청라맘스 [달청맘:청라♡가정맘 카페]) |작성자 파니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자리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이는 우리 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 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상이 대답하기를,"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북쪽 모퉁이를 통하여 들어가서 단(壇)의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고명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옥책은 일찍이 갑자년018) 변란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에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게 되었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소."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 【 형조 판서 심집(沈?)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 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 【 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말하기를,"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洪瑞鳳)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 보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상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상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물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胸哭踊。 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淸兵被甲者數百騎馳來。 上曰: "此何爲者耶?" 都承旨李景稷對曰: "此似我國之所謂迎逢者也。" 良久, 龍胡等至。 上離坐迎之, 行再揖禮, 分東西而坐。 龍胡等致慰, 上答曰: "今日之事, 專恃皇帝之言與兩大人之宣力矣。" 龍胡曰: "今而後, 兩國爲一家, 有何憂哉? 日已晩矣, 請速去。" 遂馳馬前導。 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華制。 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 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 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淸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進茶一杯, 汗使龍骨大, 告我諸侍臣曰: "今則兩國爲一家矣。 欲觀射藝, 其各效技。" 從官等答曰: "來此者皆文官, 故不能射矣。" 龍胡强之, 遂令衛率鄭以重出射, 而弓矢與本國之制不同, 五射而俱不中。 淸王子及諸將, 雜沓竝射以爲?。 俄令進饌、行酒, 酒三行, 命撤杯盤。 將撤, 有從胡二人, 各牽狗而至于汗前, 汗親自割肉投之。 上辭出, 嬪宮以下士大夫家屬之被執者, 皆聚於一處。 龍胡以汗言, 請嬪宮、大君夫人出拜, 觀者灑泣, 其實代以內人云。 龍胡等以汗所贈白馬, 具玲瓏鞍牽來, 上親執?, 從臣受之。 龍胡等又將貂?而來, 傳汗言曰: "此物, 當初意欲相贈而持來。 今見本國衣制不同, 非敢强使着之也, 只表情意而已。" 上受而着之, 入庭展謝, 使都承旨李景稷, 奉國寶以進, 龍胡受之而去。 俄而, 來詰曰: "誥命、玉冊, 何以不納耶?" 上曰: "玉冊則曾於甲子年, 因變亂失之。 誥命則送于江華, 兵戈顚倒之時, 難保其獲全, 而如或有之, 則追納何難?" 龍胡唯唯而去。 又以貂?三領, 招三公着之; 五領, 招五卿着之; 【刑曹判書沈?待罪不來。】 五領, 招五承旨着之, 【左副承旨韓興一則入江都, 故不與焉。】 謂之曰: "奉主上, 勤勞於山城, 故以此爲贈耳。" 受賜者皆伏謝於庭。 洪瑞鳳、張維入伏於庭, 請得尋見老母, 【其母入江都故也。】 金石乙屎怒叱之。 上地坐田中, 待其進退, 日?後, 始令還都。 王世子及嬪宮?二大君及夫人, 竝令留置, 蓋將以北行故也。 上退, 入見嬪宮於幕次, 留崔鳴吉, 姑令陪衛焉。 上由所波津, 乘船而渡。 時, 津卒死亡殆盡, 只有空船二?, 百官爭渡, 至攀御衣而上船。 上旣渡, 汗隨後馳來, 由淺灘渡軍, 就桑田箚陣, 令龍胡率護行軍兵, 挾路左右, 導上而行。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人定時, 始達京城, 御昌慶宮 養和堂。

    [조국에게까지 버림받은 화냥년]

    조선1637년(인조 15년)병자호란 때 오랑캐에게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이라는 뜻의 환향녀(還鄕女)라고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은 약 60만 명 정도인데, 이중 50만 명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귀국하자 엄청난 사회 문제가 되었다.사람들은 적지에서 고생한 이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기는커녕 그들이 오랑캐들의 성(性) 노리개 노릇을 하다 왔다고 하여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몸을 더럽힌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병자호란 이전 임진·정유 양난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명길이 청과의 교섭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 2만 5천여 명이 청에서 귀국하여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즉 이들 중 아녀자들에게는 "화냥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절개를 버리고 몸을 더럽힌 아녀자들을 가리킨 용어다.결국 죄없는 그녀들은 목을 매고 죽거나 강물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이에 최명길의 주청으로 국왕이 다음과 같이 교지를 내렸다

    환향녀들이 이렇게 사회 문제가 되자 인조는 청나라에서 돌아오는 여성들에게 “홍제원의 냇물(오늘날의 연신내)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들어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도성과 경기도 일원은 한강, 강원도는 소양강, 경상도는 낙동강, 충청도는 금강, 전라도는 영산강, 황해도는 예성강, 평안도는 대동강을 각각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을 것이다. 환향녀들은 회절하는 정성으로 몸과 마을을 깨끗이 씻고 각각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례가 있다면 국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러면서 환향녀들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는 엄벌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핍박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환향녀의 남편들은 이혼은 왕명 때문에 하지 않더라도 다른 첩을 두고 죽을 때까지 돌아보지 않는다거나 갖은 핑계를 대서 스스로 나가도록 유도했고,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들의 경우에도 스스로 자결하거나 문중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등, 수많은 환향녀들이 죽을 때까지 수모를 받았다.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하여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이 무렵 영의정 장유의 며느리도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와 시부모로부터 이혼 청구를 당했다. 처음에는 인조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장유가 죽은 후 시부모에게 불손하다는 다른 이유를 내걸어 결국 이혼시켰다고 한다.

    화냥년은 신계영이 속환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포로 6백여 명을 데리고 돌아온 1637년을 생성 시기로 잡는다. 이후로도 많은 포로들이 도망치거나 속전을 내고 귀국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영화 남한산성, 인터뷰 이모저모]

    영화 남한산성의 배우 박해일, 이병헌, 황동혁 감독, 배우 고수가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에 위치한 삼전도비를 방문했다.
    출처 : http://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78058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2011947&cloc=
    이병헌, 박해일 등 남한산성 주역들, 연휴에 삼전도비 찾은 이유

    남한산성 박해일 ”삼전도비 방문 어떻게 살아야 하나 되새겨”

    "영화를 보면 막판에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하는, 참담하고 가슴 아픈 장면이 있다. 근데 비석 자체를 보니까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나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속 조선의 운명이 걸린 가장 치열한 47일 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지난 3일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조선에

    강요해 세운 비석으로 우리의 아픈 역사를 대변하는 문화재다.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해 있다.삼전도비는 1895년에 매몰되었다가 1913년 다시 세워졌고, 1956년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1963년에 다시 세워지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963년 사적 제 101호로 지정됐다.

    황동혁 감독은 "한때 땅속에 묻혀졌던 이 비석을 다시세운 까닭은 결코 망각 속에 묻혀져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를 마주하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가 쓰러졌던그 자리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고민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 삼전도비를 찾게 됐다"고 방문 소감을 전했다.

    삼전도비를 둘러보고 있던 많은 시민들은 감독과 배우들의 깜짝 방문에 반색하며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삼전도비가 궁금해서 이 곳을 찾았는데 배우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며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우리의 역사를 되새겨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관람 소감을 배우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남한산성’, 제47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기사입력2017.12.22 오전 10:46 최종수정2017.12.22 오전 10:47 기사원문 네이버뉴스배우 이병헌, 김윤석 주연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이 제 47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의 ‘그림자들의 역사’(A History of Shadows)에 초청됐다.

    [전창빈 국방광장]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 말자!

    1636년(인조 14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조선의 운명이 걸린 피 말리는 47일이 전개된다. 청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추위와 굶주림, 군사적 열세 속에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앞날에 대한 대신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항복해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의 공격에 맞서 싸워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 인조의 번민은 깊어지나 결국 항복을 선택하게 되면서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를 하는 치욕을 당한다.

    최근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다.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 연신 물을 들이켰다.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모두 묵묵히 화면만 바라보았으며 가끔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니? 끝까지 싸울 거니, 항복할 거니?”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초등학생에게나 하셔야 할 그런 질문을 하시네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게 미리 나라를 튼튼하게 했죠.” 우문현답이라 생각했다.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미국의 군사전략가 ‘호머 리’의 저서 『무지의 만용(The valor of ignorance)』이 떠올랐다. 이 책은 1909년에 출간됐는데 한 나라의 평화와 번영은 오직 군사력에 의해서만 보장되고, 이 군사력은 평화의 시기에 준비해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마키아벨리는 인류의 전쟁은 연기할 수는 있지만, 결코 피할 수는 없다고 했다. 『무지의 만용』도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을 충실히 입증하고 있다. 힘의 뒷받침 없는 평화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준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100여 년 전 사람인 호머 리의 주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있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있었다. 그 후 약 10년 뒤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피폐해졌지만 그래도 약 30년간 철저히 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으며, 정묘호란 이후 약 10년간 더욱 철저히 국방력을 강화해야 했다. 전쟁이 연기되고 있던 평화의 시기에 전쟁에 대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남한산성에서 주화파와 척화파 중 어느 쪽이 옳았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양측 모두 평화의 시기에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1636년 매섭게 추웠던 남한산성, 그 속에 갇혀 있던 무력한 조정과 죄 없이 고통받은 가엾은 백성들을 기억하자. 그리고 삼전도의 치욕을 절대 잊지 말자.


    [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데스크칼럼]굴욕적인 삼전도비는 하나로 족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중국 관영 매체들은 잇따라 한국에 3불(不)의 철저한 이행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이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제시한 게 이른바 3불이다. 한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방어체계(MD) 참여, 한미일 군사동맹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중 관계 정상화 과정에서 제시된 3불이 우려한대로 중국에 추가 압박의 빌미를 제공하며 우리의 안보 주권까지 훼손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중문ㆍ영문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와 글로벌타임스는 지난달 24일(현지시간)ㆍ25일 "한국이 3불을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구시보는 한 발 더 나아가 한까지 촉구했다. 1한이란 한반도 배치 사드 사용을 제한한다는 뜻으로 한국에 배치된 방어용 군사무기 운용과 관련해 중국이 알 수 있도록 공개하라는 일종의 주권 유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항의했다는 말을 우리는 들은 바 없다.

    1한은 환구시보에 처음 등장한 용어다. 중국 외교부나 인민일보 같은 주요 기관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가 사용한만큼 중국 정부의 속내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4일 "방중 때 사드 문제가 의제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글로벌타임스는 "중국과 한국이 지난 10월 양국관계를 어떻게 회복할지 발표했지만 사드 문제는 여전히 양국의 핵심 의제로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방중 때 사드 문제가 의제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글로벌타임스는 지난달 24일 논평에서 "한국이 3불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한중 관계가 낮은 단계로 곤두박질치고 양국 신뢰 관계는 치명타를 입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환구시보는 지난달 29일 또 "3불과 함께 1한이야말로 대중(對中)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이 취해야 하는 마지노선"이라고 협박했다.

    워싱턴 소재 미국평화연구소(USIP)의 프랭크 엄 수석 연구원은 지난달 미국의 소리(VOA) 방송과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한중간 이번 합의에 실제로 논란의 소지가 될 내용은 별로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이 오랫동안 대중 관계를 고려해 MD 편입이나 한미일 군사동맹은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동시에 체면도 살릴 방법이 필요했고 한국 역시 기존 정책에 반하지 않는 수준의 양보로 대중 관계 개선을 택했다는 게 엄 연구원의 평가다.

    그러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폴 에반스 아시아환태평양 관계학 교수는 "이번 한중 합의가 조약 같은 구속력을 갖고 있진 않지만 한국에 일종의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달 22일 중국이 내놓은 한중 외교장관회담 결과문에 따르면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은 "중국에 말에는 신용이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결과가 있어야 한다(言必信行必果)는 말이 있다"고 발언했다. 우리 정부가 약속이 아니라고 부인한 3불 이행을 대놓고 요구한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옭아맨 결과다.

    이렇듯 중국은 이참에 한국의 무릎을 꿇리려 애쓰고 있다. 중국의 오만함이 우리 주권을 훼손하려 드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아직 조율 중이라는 한중 정상회담 의제에서 우리가 과연 뭘 건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무릎 꿇린다는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게 있다.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자리잡은 병자호란 당시 청(淸)나라의 전승비 삼전도비(三田渡碑)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인조는 삼전도에 나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를 올리며 굴욕적으로 항복했다.

    역사는 배우라고 있는 것이다. 굴욕은 한 번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