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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산군 이염 묘

회산군 이염 묘 위치 : 도봉구 방학동 산85-1

묘역의 가장 상단에는 회산군(檜山君) 이염(李恬)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장락원정(掌樂院正) 수립(秀立), 돈녕부교위(敦寧府校尉) 무립(茂立), 서창수(西昌守) 용(墉), 의성군(義城君) 강(鋼)의 묘가 차례로 있다. 전체 좌향은 동남향이다.

회산군 이염의 생몰년은 1481년(성종12)~1512년(중종7)이고, 호는 보익당,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종의 5남으로 어머니는 숙의 남양홍씨이고, 부인은 죽산 안씨 방언의 딸인 영원부원군부인으로 딸 1인을 두었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견성군의 아들 계산군 수계로 후사를 이었다. 1500년(연산군6) 형 안양군과 아우 봉안군과 상의하여 연산군에 직간하다가 다른 두 대군은 죽고, 회산군만 궐문 밖으로 방면되었다. 1506년(중종1) 아우인 영산군 및 중신과 더불어 반정을 계획하였다. 이에 중종이 즉위함에 사면되었으나 국정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중종 7년(1512) 4월 5일 실록 기사를 보면, “회산군 이염이 앓으므로 내의(內醫)를 보내어 알아보고 또 맞는 약을 주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회산군 묘표 뒤에 정덕(正德) 7년(1512)이 나오며 이해가 회산군이 졸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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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묘

이집묘, 위치 : 도봉구 방학로 278-33

덕수이씨(德水李氏) 종파의 묘역에는 세대별로 필(泌)-안눌(安訥)-합(柙)-광하(光夏)-집(㙫)-주진(周鎭)-은(溵)-학빈(學彬)의 묘가 있으며 예조판서를 지낸 안눌의 묘는 당진에 있고 한성판윤을 지낸 광하의 묘는 연천에 있다.

이집의 생몰년은 1664년(현종 5)∼1733년(영조 9)이다. 자는 노천(老泉), 호는 취촌(醉村)이고, 아버지는 한성부판윤 광하(光夏)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심지원의 딸이다. 1684년(숙종 10) 사마시, 169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07년 다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1710년 승지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다. 영조대에 예조·이조판서 등을 거쳐, 1729년(영조 5) 우의정이 되었고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묘는 단분합장이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그리고 사성 양 끝단을 장방형의 석재로 마무리하였고, 봉분 뒤 사성 아래에도 3단의 장방형의 석재로 받쳐 조성했다. 좌향은 남동향이며, 묘표·혼유석·상석·향로석·망주석·문인석 등을 갖췄다.묘표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이다. 비신 전면에 『朝鮮國左議政德水李公㙫之墓』『貞敬夫人安東金氏祔左』라 새겼다. 입석연대는 『皇明崇禎紀元後再甲寅四月日立』(1734년, 영조 10)이며, 규모는 옥개석 108×68 ×32㎝, 비신 64×24×148㎝, 비좌 106×72×46㎝이다. 문인석은 소형으로 裳 위와 後綬에 각각 화문을 장식했다. 한편, 이집의 元配인 豊山洪氏의 묘는 묘역의 맞은편 구릉 묘역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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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바둑판 돌

방학동 바둑판 돌 위치 : 위치 : 도봉구 방학3동 방학동천주교성당 묘역 안

바둑판이 새겨진 돌은 마름모꼴의 화강암(크기 183*145*24cm)으로 윗면에 3cm 정도를 높여 19줄 바둑판(크기 55*52cm)을 선각해 놓았으며, 양옆에 바둑돌을 넣어두기 위해 원형의 홈(지름 11cm)을 파 놓았다. 그리고 이 바둑판 돌 앞에는 원형의 석조 1기가 있는데, 위면에 복련(覆蓮)이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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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묘

염상섭 묘 위치 : 도봉구 방학3동 방학동천주교성당 묘역 안

염상섭(廉想涉, 1897년 8월 30일 ~ 1963년 3월 14일)은 서울 적선동 출생이며 호는 횡보(橫步)이다.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도일하여 교토부립중학(京都府立中學)을 졸업,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0년 《폐허(廢墟)》지 동인에 가담하여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921년 《개벽(開闢)》지에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적인 위치를 굳히고 1922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에서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萬歲前)》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三代)》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破産)》 《일대의 유업(遺業)》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驟雨)》 등이 있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서 김동인·현진건과 함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 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장에 취임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에 3·1문화상(三一文化賞),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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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묘

이무영 묘, 위치 : 도봉구 방학3동 방학동천주교성당 묘역 안

이무영(李無影.1908.1.14∼1960.4.21)은 충북 음성 태생으로 휘문중학을 수료하고 18세에 작가가 되려는 뜻을 품고 도일(渡日)하여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문하에서 1925년부터 1928년에 걸쳐 수업했다. 22세때 귀국하여 소학교 교원, 잡지사 기자, 신문기자 등의 생활을 하면서 소설ㆍ시ㆍ희곡 등을 발표했다. 1936년 [동아일보]가 일장기말소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정간(停刊)되자 한때 [조선문학]지를 주재했다. 이 무렵 그는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의 한 사람이었고, [구인회(九人會)]의 한 멤버이기도 했다, 1939년을 고비로 하여 그는 인생과 문학의 일대 전환을 꾀하여 서울을 떠나 농촌인 군포(軍捕)로 가서 직접 농업에 종사하면서 <제1장 제1과>를 발표하여 본격적인 농민작가(農民作家)로서의 각광을 받았다. 이어 <속 제1장 제1과(흑의 노예)> <농민> 등을 발표하여 농민문학의 선구자로서 농촌소설을 집필해 나갔다.    6ㆍ25 후에는 그 농촌세계가 도시를 제재로 한 시정소설(市井小說)로 바뀌어진다. 생가는 충북 음성군 음성읍 석인리 오리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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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동문(明月洞門) 바위글씨

명월동문(明月洞門) 바위글씨, 위치 : 도봉구 방학로 278-33

바위글씨는 자연바위면을 직사각형(110x30cm)으로 정면한 후 우에서 좌로 ‘명월동문(明月洞門)’을 새겨 놓았다. 해서체로 쓰여진 바위글씨는 ‘명월동이라는 계곡으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나 현재 쓴 사람과 새긴 시기는 확실치 않다. 도봉구에서 우이동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나있는 곳은 예전에는 계곡이었다. 예전 계곡에는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계류가 일정한 흐름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곡에서 보는 달빛이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밝은 달빛이 비추는 계곡 입구’란 ‘명월동문’을 새겼던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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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수석(谿水石)·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와폭(臥瀑) 바위글씨군

계수석(谿水石)·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와폭(臥瀑) 바위글씨군, 위치 : 도봉구 방학로 278-33 (방학동천주교묘지 바위글씨군)

천주교 공원 묘지는 가지능선 사이로 ‘Y’자형으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는데, ‘Y’의 오른편 계곡엔 계수석(谿水石)·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와폭(臥瀑)이라는 바위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은 ‘달맞이 바위 아래 3층 폭포’라는 의미이고, 와폭(臥瀑)은 직하하는 폭포가 아니라 ‘비스듬히 떨어지는 폭포’라는 의미이고, 계수석(谿水石)은 ‘계곡의 물과 바위’란 의미이다. 하지만 ‘계(谿)’자는 반이 떨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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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례(韓致禮) 묘

한치례(韓致禮) 묘, 위치 : 도봉구 방학동 산64번지

한치례의 생몰연대는 1441년(세종23)~1499년(연산군5)이며, 본관은 청주, 字는 자절(子節)이고, 아버지는 한확(韓確)이다. 무과에 급제,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왕의 외숙으로 중용, 1471년 3월 좌리공신 4등으로 서릉군에 봉해졌다. 이후 이·호·병·공조 등의 판서를 두루 역임, 1499년(연산군5) 영돈녕부사로 서릉부원군에 봉해졌다. 왕실의 인척으로서 아버지 한확 이래 명나라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명나라로부터 ‘韓族'이라 불렸다한다. 부인은 국산안씨로 한치례보다 7년 앞서 졸했다.

묘는 단분합장, 좌향은 서남향. 묘표·상석·향로석·장명등·문인석 2쌍·신도비 등을 갖췄다. 비신 전면에는 「領敦寧府事西陵府院」, 「君贈諡莊簡韓公之墓」라 새겼고 후면에는 상단에 「貞敬夫人安氏墓碣」이라 새기고, 그 아래 음기를 기록하였다. 입석연대는 「弘治紀元之五年五月日長孫世昌立石(1492년, 성종23년)이다. 이 묘표는 배위인 정경부인 안씨의 묘갈을 1492년에 먼저 세우고, 한치례가 졸한 이후에 그 반대면을 활용하여 한치례의 묘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신도비는 묘 입구 오른쪽에 위치하며 이수형으로 이수와 비신이 한돌. 2면비로 비문은 마모가 극심하다. 전액은「莊簡韓公神道卑銘」이고 비제는「有明朝鮮國純誠佐理功臣輔國崇祿大夫領□寧□□□□□□□□□諡莊簡□神道卑銘幷序」이다. 입석연대는 1500년(연산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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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비 묘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 내)

성비 묘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 내), 위치 : 도봉구 방학동 산61-1번지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은 방학사거리에서 우이계곡 방향으로 진행하다 신동아아파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나오는 왼편 구릉에 있다. 묘역의 입구에는 재실이 있다. 묘역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돌면 창평수(昌平守) 근(瑾)의 묘가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 올라 여산부수(驪山副守) 계붕(季鵬), 엄천수(嚴川守) 거(琚), 풍기군부인(豊基郡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가 차례로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충청감사(忠淸監司) 충작(忠綽)과 풍기군부인(豊基郡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의 묘가 있다. 또한 충작의 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철산군수(鐵山郡守) 인걸(仁傑)의 묘가 있다. 한편, 묘역의 서쪽 끝에는 성비(誠嬪)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묘가 있다.

「全州李氏臨瀛大君貞簡公派大同譜」에 의하면, 성비 원주원씨는 조선의 창업주 태조의 후궁으로 아들이 없어 후사를 오산군 이주가 맡게 되었다고 한다. 묘는 단분단독장이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묘표·문인석·장명등 등의 옛 석물과 근래 건립한 혼유석·상석·향로석 등을 갖췄다. 봉분에는 네모꼴의 호석을 2단으로 둘러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는 400×510㎝이다. 묘표는 규수형, 2면비인데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할 수 없다. 규모는 비신 37×17×77㎝이다. 이 묘표를 대신하여 옆에 신비석을 놓았는데, 비신 전면에 「誠嬪原州元氏之墓」라 새겼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했고, 홀을 맞잡은 손을 간략하게 표현하였으며, 허리 뒤의 大帶가 허리보다 다소 높게 표현되었다. 규모는 총고 197㎝이다. 장명등은 옥개석이 없는 상태이고, 화사석 및 대석 또한 반파된 상태이다. 잔존 총고는 95㎝이다

오산군(烏山君) 이주(李澍)의 생몰연도는 1437(세종19)~1489(성종20) 이며, 세종대왕의 4남인 임영대군의 장남이다. 1444년(세종26)년에 정의대부 오산군에 봉해지고 현록대부에 이르렀다. 성종대에 문소전 사옹원의 제주가 되었다. 元配인 풍기군부인 창녕성씨는 아들 없이 딸 둘을 두었으며, 後配인 풍기군부인 연안김씨는 7남을 두었다. 시호는 정목(靖穆)이다. 묘는 단분단독장이고, 근래에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동향이며, 묘표·문인석·장명등 등의 옛 석물과 근래 건립한 혼유석·상석·향로석·신비석 등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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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비별장터(조선조 익종의 비)

조대비별장터(조선조 익종의 비)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86-1 (현 광륜사)

도봉1동 401번지에 있는 광륜사(현재) 절은 원래 조대비의 별장터로 조대비는 조선조 영돈령부사로 풍원부원군으로 피봉된 조만영의 딸로서 순조 세자빈(익종의 비)으로 책봉되었다.

후에 헌종을 낳았고, 헌종이 조선 제24대 왕위에 오르자 대비 존호를 받았으며, 수렴청정으로 한때 조정을 대행하기도 하였고, 한성판윤을 역임한 부친인 조만영은 헌종 12년(1846년)에 타계하였고, 묘는 풍양조씨 선산인 방학동 소재 시루봉 산기슭에 있으며, 조대비는 풍원부원군이 죽자 선산과 인접하고 산수가 수려한 도봉동에 별장을 지어 만년을 보냈고, 그 후 고종때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국정을 보기도 한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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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원점(樓院店)

누원점 다락원 터 위치 :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역앞 횡단보도 건너편

도봉산 입구 자연마을인 안골이 있는데 이곳을 다락원이라 부른다. 다락원은 한자로 표기하면 누원(樓院)이 되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18세기 후반 사상도고(대규모 민간 도매상)들이 커다란 장시를 이루어 도성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던 중요한 거점이었다. 특히, 누원점(樓院店) 은 서울로 오는 곡식과 옷감 등을 나르는 길목으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물건을 사고 팔거나 상인들과 연결이 쉬어 상인들의 활동 중심지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의 번성했던 자취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곳이 과거의 누원점 터였음을 알려주는 조그만 표지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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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리 석조이정표

창동리 석조이정표 위치 : 도봉구 창원새싹길 30

창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양곡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창동리"라고 음각된 석조 이정표는 창동 초등학교옆 공터에 옛날부터 있었으나 오랜 풍화작용으로 창동리라고 음각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데다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 서울 육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석조 이정표가 서울의 명소600선중 267번으로 지정된바, 주민들의 노력으로 창5동사무소 옆 공터를 보존장소로 정하고 옛 석조 이정표를 원래 모습 그대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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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목사 선정비(善政碑)

양주목사 선정비 위치 : 방학로3길 쌍문2동주민센터 입구

1. 이여적(李汝迪) 양주목사 선정비
이여적 양주목사 선정비 앞면에는 ‘牧使李公汝迪永世不忘碑(목사이공여적영세불망비)’, 뒷면에는 ‘雍正十三年乙卯正月日立(옹정십삼년을유정월일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雍正十三’은 1735년(영조11)이다. 황해 수사, 곡산 부사, 장단부사를 역임하던 이여적은 1728년(영조4) 경상도에서 난이 일어나자 경기방어사 자격으로 병사를 이끌고 내려가서 경상우병사가 되어 난을 토벌하였다. 1732년(영조8)에는 양주목사가 되어 1735년(영조11)에 선정비가 세워졌다. 그 뒤 풍덕 부사 등을 역임했다.

2. 임한수(林翰洙, 1817∼1886) 양주목사 선정비
임한수 양주목사 선정비에는 ‘牧使林公翰洙(목사임공한수)’라고 씌여져 있다. 임한수(林翰洙)는 1864년(고종1) 3월부터 1869년(고종6) 6월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병조참판, 공조참판, 이조 참판, 경주 부윤, 의주 부윤, 강원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승지 등을 역임했다. 생애 마지막 관직은 1886년 임명된 공조 판서였다. 1891(고종28) 고종으로부터 ‘효정(孝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3. 이봉의(李鳳儀, 1839~1919) 양주목사 선정비
이봉의 양주목사 선정비 앞면에는 ‘牧使李公奉儀愛民善政碑(목사이공봉의애민선정비)’라고 씌여져 있다. 이봉의(李鳳儀)는 1868(고종5)에 관직에 나와서 1869년(고종6) 5월 2일부터 5월 16일까지 2주간 양주목사를 역임했다. 이후 한성부 우윤, 충청도 병마절도사, 춘천 부사, 좌변포도대장, 한성부 판윤, 중추원 일등의관, 강원도 관찰사, 국방부 장관격인 군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완성군(完城君)으로 불리웠다.

4. 홍태윤(洪泰潤) 양주군수 선정비
홍태윤 양주군수 선정비 앞면에는 ‘郡守洪公泰潤愛民善政碑(군수홍공태윤애민선정비)’, 후면에는 ‘年 癸卯三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癸卯’년은 1903년 이다. 홍태윤 양주군수 선정비는 홍태윤이 양주군수로 재직 중에 세워진 것이 특징이다. 홍태윤은 1885년부터 궁성 호위를 맡았다. 임오군란이 나던 해 통위영 영관(統衛營領官)으로서 궁성을 호위하던 홍태윤은 명성왕후가 왕궁을 탈출하는데 공훈을 세워 포천 현감으로 영전하게 된다. 이후 영평 군수, 진위 군수를 거쳐 1902년(고종39) 2월 양주 군수로 임명된다. 홍태윤은 고종이 퇴위되던 1907년 7월까지 양주군수를 역임해 조선왕조 마지막 양주 목민관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홍태윤은 무관 출신 거구로서 타고 다니던 말의 허리가 가끔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목민관으로 훌륭한 선정을 펼쳤다고 해서 일화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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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샘

원당샘 위치 :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묘 맞은편

원당샘은 연산군묘 인근에 위치하며,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우물로서 수백년동안 이곳 마을 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명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으나, 1979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면서 원당샘으로 명명되었다. 풍부한 수량으로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2011년 완공된 원당샘 주변 공원화 사업을 통해 원당샘을 중심으로 연산군묘,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인 은행나무, 북한산 둘레길 등과 연계하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도봉구 명소로서의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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