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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지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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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0호 - 위치 : 도봉구 방학로 264 - 지정일 : 1982.11.13.

조선 세종의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부마인 양효공 안맹담(安孟聃, 1415∼1462) 부부 의 묘소이다. 양효공의 신도비에 의하면 안맹담은 고려시대 귀족이던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후손으로 부친은 가선대부 함길도(咸吉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와 함흥부윤(咸興府尹)이던 안망지(安望之)이며, 어머니는 봉상시(奉常寺) 주부(主簿) 허지신(許之信)의 따님이다. 태종 15년(1415) 12월 28일 출생으로 자(字)는 덕수(德壽)이다. 14살 때인 1428년 세종대왕의 둘째 따님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세종 14년(1432)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세종 32년(1450)에는 연창위(延昌尉)에 개봉되었다. 그 뒤 계속 품계가 올라 세조 3년(1457) 정월에는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올랐으며 그 해 8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평소 초서(草書)와 활쏘기·말타기를 잘 하였고 음률(音律)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약물(藥物)을 갖추어 놓고 남에게 봉사하였고, 불법(佛法)을 좋아했다고 한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수명이 길지 않아 세조 8년(1462) 12월 25일 마흔 여덟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묘소는 도봉산(道峰山)의 한 지맥인 시루봉[甑峰] 남쪽 기슭에 부인 정의공주의 묘와 나란히 위치한다. 묘 앞에는 각각 "수록대부연창위양효공안맹담지묘(綏祿大夫延昌尉良孝公安孟聃之墓)"와 "정의공주지묘(貞懿公主之墓)"라고 새겨진 묘갈(墓碣)이 있으며, 네 구의 석인상(石人像)과 석등(石燈)이 세워져 있다. 이 일대는 죽산 안씨의 공동묘역으로 수많은 묘가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묘비(墓碑) 연구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묘소보다 한 단 아래에 위치한 신도비는 1466년 7월에 건립된 것으로 귀부(龜趺)·비신(碑身)·이수(螭首)를 모두 갖추었다. 지대석 위에 놓인 화강암제 귀부는 높이 1.2m, 길이 2.8m, 너비 1.7m나 된다. 귀부 위에 세운 대리석제 비신은 이수와 한 돌로 되어 있는데, 이수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비문은 안맹담의 사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지었다. "양효안공묘비(良孝安公墓碑)"라 새긴 머리전서[頭篆]와 비문 글씨는 양효공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安貧世)가 썼는데, 서풍은 조선 초기에 유행한 송설체(松雪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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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 위치 : 도봉구 도봉로 169라길 111-6 - 지정일 : 1997.12.31.

조선 15세기의 종친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1465∼1507)의 묘역과 신도비이다. 그는 세종의 아홉 번째 지자(支字)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아들이다. 세조 11년(1465) 출생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며, 어머니는 좌찬성에 추증된 신윤동(申允童)의 따님이다. 어려서 외할머니 이씨의 손에 자랐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열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의 군(君)에 봉해졌고, 그 뒤 사옹원 제조를 지냈으며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연산군 12년(1506) 큰아들 완천부정(完川副正) 이기(李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했는데, 그는 남해(南海)에 정배되었다. 수개월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복직되었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다. 중종 2년(1507) 4월 27일 사망하였으며, 그해 8월 임신 일에 도봉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는데, 11살 때 어머니 신씨를 잃었고 3년이 채 못되어 다시 부친상을 당하였다. 또 매사에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특히 상례(喪禮)를 잘하여 종친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뜰에 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부인 유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유양(柳壤)의 따님으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비는 1509년 9월 건립된 것으로 상하 2단의 받침돌 위에 대좌(臺座)를 얹고 그 위에 백일석으로 만든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얹은 형태이다. 대좌에는 연꽃잎 무늬와 안상(眼象)을 새겼고,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을 비(非) 대칭적으로 새긴 점이 특이하다. 16세기 초를 대표하는 석비로서 임당정공신도비(林塘鄭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 등 17세기 석비의 선례가 된다. 비문은 큰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袞, 1471∼1527)이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다. "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도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 금동지묘(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
금동지묘(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

영해군 이당을 비롯한 후손들 묘역 하단에 묻혀 있는 충노 금동지 묘는 조선시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노비의 묘역으로 비문까지 있다. 일화에 의하면 금동은 세종의 증손자인 강녕군 ‘기’의 종으로 정원이 잘 가꿔진 아담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연산이 사랑하는 기녀가 ‘기’의 집을 빼앗고자 “노비 금동이를 시켜 ‘기’가 첩을 욕하도록 했다.” 라고 일러바치자 연산은 노하여 ‘기’와 ‘금동’을 가두고 낙형으로 심문하자 “죄는 종에게 있을 뿐 주인께선 전혀 모르시는 바입니다.” 라고 함으로써 기는 화를 면하고 금동은 마침내 형벌을 받았으며, 강녕군 부자와 여러 형제는 남해섬으로 귀양살이를 갔다가 중종반정으로 관작이 회복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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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암석불좌상

만월암석불좌상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1호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2-4 -지정일 : 1999.5.19

도봉산 만장봉(萬丈峰) 중턱에 위치한 만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승려이자 화엄종의 개조(開祖)인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 창건시기를 신라시대까지 올려볼 수 있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이후 만월암은 보덕굴(普德窟)이라는 참선도량으로 알려져 오다가 1940년에 이르러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에 의해 중창되어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을 비롯하여 만월선방(滿月禪房)ㆍ삼신각ㆍ요사채 등이 있는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만월보전 뒤에 있는 석굴에서는 엽전과 도검(刀劍)ㆍ방패ㆍ화살촉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석굴법당인 만월보전 안에 본존불로 모셔진 이 석조여래좌상은 등신대(等身大)에 가까운 크기로 세부표현이 간략하여 원통형처럼 보이나 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이 약사여래상은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배치된 삼존불 형식으로 되어 있으나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본존불에 비해 크기가 작고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본존불인 약사여래상은 아담한 머리와 단정한 불신 그리고 양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 등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석벽에는 불상조성기(佛像造成記)가 남아 있어 이 약사여래상의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건융사십구년육월일불상개금시…(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로 보아 1784년에 불상을 개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개금시기와 불상양식을 감한다면, 1700년대 전후로 추정된다. 불상이 이름을 만월담석조약사여래좌상으로 표기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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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사비로자나삼신불도

천축사비로자나삼신불도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2호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2-2 -지정일 : 2009.11.5.

불화는 가로가 긴 화면이 상하로 구분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삼신불이 나란히 앉아있고, 하단에는 보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삼신불은 중앙에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법신 비로자나불, 왼쪽(向右)에는 양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설법인(說法印)을 취한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린 설법인을 취한 석가모니불이 자리하고 있다. 삼불은 모두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지고 목리문(木理文 : 나무결 무늬)이 표현된 불단 위의 연화좌에 앉아 있다. 삼불 이외의 공간에는 최상단에 4보살과 좌우에 시방제불, 그 아랫단에는 2보살과 범천 및 제석천이 삼불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그 아랫단은 삼불과 하단의 보살중 사이에 해당하는데 중앙 비로자나불의 무릎 좌우에는 가섭과 아난존자, 양 끝에는 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하단의 8보살은 모두 원형의 두광과 모서리가 둥글려진 직사각형의 신광을 지고 있다. 지장보살을 제외한 모든 보살은 동일한 모습의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각기 지물(持物)을 들고 있다. 이 불화는 이처럼 삼신불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19세기 중엽부터 서울.경기 지역에서 활발하게 불화제작을 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碩)이 편수(片手)를 맡아 환감(幻鑑).혜조(慧照).경림(璟林).탄인(呑仁).창오(昌悟) 등이 제작한 작품이다. 경선당 응석은 천축사 삼신불도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 작품을 그리되 간혹 도상을 나름대로 변화시켜 새로운 도상을 창출하곤 하였다. 갸름한 얼굴과 지극히 작은 이목구비의 얼굴, 꽃무늬가 새겨진 대의, 적.녹.청색의 색조, 목리문의 표현 등 응석 불화의 양식적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화폭의 오른쪽 하단에'臣尙宮己酉生朴氏 尙宮己酉生金氏等○○奉爲 王妃殿下辛亥生閔氏玉體恒安聖壽萬歲'라 시주질이 기록되어 있어 상궁 박씨와 김씨 등이 명성황후 민씨(1851∼1895)를 위해 시주한 불화임을 알려주고 있다. 상태는 전체적으로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으나, 화면의 상단이 그을음 등으로 채색이 어두워져 있고, 화폭의 상단 오른쪽이 일부 찢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 불화는 19세기 서울 경기 지방의 대표적 화승인 경선당 응석이 주관하고 대선사 하은 예가(荷隱 例珂 : 1828~1898)가 증명한 불화로 독특한 도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고, 또한 명성황후를 위해 상궁들이 시주하여 제작하였다는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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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사비로자나삼신괘불도

천축사비로자나삼신괘불도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93호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2-2 -지정일 : 2009.11.5.

비로자나삼신불입상이 화면에 꽉 차게 그려진 구도이다. 중앙에 지권인을 취한 법신 비로자나불, 왼쪽에는 설법인을 취한 보신 노사나불, 오른쪽에는 항마인(降魔印)을 취한 화신 석가모니불이 배치되어 있다. 보통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각기 지권인과 촉지인(觸地印)을 취하는 여래형으로 표현되고, 노사나불은 양손을 어깨쪽으로 들어 설법인을 취하며 보관(寶冠)과 영락(瓔珞) 장식으로 장엄한 보살형 또는 여래형 두 가지로 표현되고 있다. 19세기 서울.경기 지방에서는 이러한 삼신불 혹은 삼세불을 주제로 한 괘불이 유행하였는데 삼신불을 주제로 한 괘불 중에는 흥천사 괘불(1832년).청계사 괘불(1862년).불암사 괘불(1895년)처럼 삼불을 모두 여래형으로 표현하는 불화도 있는 반면 이 천축사 괘불처럼 지권인.설법인.촉지인의 전형적인 수인(手印)을 취하고, 삼불이 동일한 대의를 입은 여래이지만 보신불과 화신불 모두 보관을 쓴 보살형으로 표현된 예도 있다. 법신불의 우위를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일 수 있겠으나 19세기 들어 빈번히 보이는 도상의 와해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화면 상부의 여백에만 구름을 간략히 표현하였을 뿐 다른 존상이나 장식이 없이 오직 삼불(三佛)로 화면을 채우는 구성 뿐만 아니라 뾰족한 육계, 화려하고 도식적인 큼직한 보관, 적ㆍ녹ㆍ청색의 주조색, 그리고 육색(肉色)을 황색으로 처리한 점, 대의 끝단의 작은 꽃무늬, 색의 농담으로 입체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설채법(設彩法) 등이 19세기 경기도 지방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괘불은 하운당 유경(河雲堂 有鏡)이 창엽, 총지, 봉조, 총륜과 함께 제작한 불화로 유경은 3년후 1861년 화계사 칠성도(가평 현등사 소장)를 조성하였으나 이외의 작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넓적한 형태의 얼굴과 눈은 가늘지만 비교적 큼직한 이목구비, 특히 리본처럼 그려진 입술의 모습이 하운당 유경의 특징적인 양식으로 보인다. 창엽과 총륜은 같은 해 9월 응석의 주관으로 조성된 남양주 흥국사의 괘불 제작에도 함께 참여하였다. 두 괘불은 같은 해에 제작되었고 참여한 화승도 2명이나 공통되나 수화승(首畵僧)에 따라 불화의 양식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이 불화는 화면에 손상이 없고, 화기가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채색도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등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한 괘불(掛佛)로서 규모는 크지 않고 연대는 오래되지 않았으나 삼신불을 그린 구성과 양식 등이 19세기 서울.경기지방 괘불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으며, 금어인 하운당 유경은 남아있는 작품이 희귀하여 그의 독특한 불화 양식 규명과 19세기 불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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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

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 - 지정번호 : 서울시유형문화재 제347호,  -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2-2 - 지정일 : 2013. 5. 23.

목조석가삼존불좌상(석가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은 조선후기 전형적인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목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88.5㎝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중형 불상이다. 불상은 얼굴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얼굴이 신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3.2이다. 이러한 신체 비례는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에서 볼 수 있고, 17세기 중․후반으로 갈수록 신체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로 표현되고, 육계 밑에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와 정수리 부위에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바닥을 아래로 가지런히 놓고, 따로 제작된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고 있다. 바깥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 어깨에서 완만하게 팔꿈치와 복부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하반신에 펼쳐져 있다. 하반신에 걸친 대의자락은 복부에서 오른쪽으로 몇 가닥이 완만하게 펼쳐지는데, 가장 안쪽 옷주름이 두툼하게 접혀 있다. 반대쪽 대의자락은 무릎 방향으로 네 가닥 정도 접혀 있다. 목조보살좌상은 석가불과 거의 동일한 인상과 착의법을 하고 있지만, 머리 위의 보관이나 어깨에 늘어진 보발 등의 표현이 다르다. 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좌상은 얼굴의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오른쪽 어깨에 완만하게 늘어진 대의자락, 왼쪽 어깨에 수직으로 늘어진 한 가닥의 옷주름, 하반신에 걸친 대의 자락 표현 등이 1614년에 조각승 현진(玄眞)이 만든 전남 구례 천은사 목조삼존불좌상과 유사하여 17세기 전반에 현진이나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불상에서 발견된 두 장의 중수발원문은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조각승과 불화승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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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사 치성광여래삼존도

도봉사 치성광여래삼존도  -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9호   -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89  - 지정일 : 2013. 9. 26.

치성광여래삼존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북두칠성과 해와 달, 三台六星, 28宿 등 하늘의 별들을 여래, 보살, 도인 등의 모습으로 의인화하여 그린 불화로서, 산신도, 독성도와 함께 사찰 내의 삼성각에 봉안되거나 별도로 독립된 칠성각에 봉안된다. 도봉사 치성광여래삼존도는 관허당 의관을 수화승으로 하여 두명의 화승이 제작한 것으로 1m 내외(113×93.5cm)의 작은 화면에 정면 좌상의 치성광여래 좌우에 시립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붉은 해와 흰 달이 그려진 보관을 쓰고 본존을 향해 측면향으로 선 간략한 삼존 형식이다. 화면 아래에서 뻗어오른 줄기가 달린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치성광여래는 갸름한 얼굴에 육계가 뾰족하며 오른손은 가슴 부근에, 왼손은 복부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이다. 이같은 치성광여래의 모습은, 서울 미타사 치성광여래삼존도(1874년), 서울 봉은사 치성광여래삼존도(1886년) 등 금륜(金輪)을 든 치성광여래가 우차(牛車)를 탄 전통적인 도상을 계승한 치성광여래삼존도와 더불어 조선후기에 성행했던 치성광여래삼존도 도상 가운데 하나이다.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은 각기 손에 흰 연꽃줄기와 여의를 들고 치성광여래를 향해 몸을 틀고 서있는데, 천의 자락이 길게 늘어져 다소 번잡한 느낌을 준다. 치성광삼존 위로는 갖가지 색으로 장엄한 보개(寶蓋)와 채운(彩雲)이 가득 그려져 있다. 화기에 의하면 이 치성광여래삼존도는 원래 ‘取頂山 □□寺內院庵’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 내원암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취정산은 대구 가창댐에서 헐티재로 가는 곳에 위치한 산인 것으로 보아 이 불화가 경상북도 지역에서 제작 봉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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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천룡도

석굴암 천룡도  -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0호  -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2-4  - 지정일 : 2013. 12. 26.

크지 않은 작은 규모(49×55cm)에 간략한 내용의 신중도로서 人法堂에 봉안했던 불화로 판단된다. 등장 존상 및 화기 중의‘天部會幀’이라는 내용으로 보아 제석범천도 불화 중 위태천 중심의 天龍圖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태천은 여덟의 무장한 모습의 팔부중을 거느리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불화에서는 두 천부중 만을 나타내고 있으며, 위태천의 자세 또한 立像이 아닌 坐像으로서 法床 위에 반가 자세로 걸터 앉아 왼발을 내려딛고 있는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필선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며, 색채 또한 적․녹색 위주로 조화로움을 볼 수 있으며, 활기찬 각 존상의 신체 비례 역시 6等身대로 세련미를 보인다.

1745년 화승‘海淸’이 그린 이 불화는 화기의 훼손으로 봉안 사찰을 잘 알 수 없으나 조성시기가 분명하고‘齋主’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재를 지내기 위해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천룡도로서, 18세기 중반 불화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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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목서흠 묘역

충정공 목서흠 묘역 - 지정번호 : 서울시 기념물 제27호 - 위치 : 도봉구 방학로 252-18 - 지정일 : 2009.6.25.

충정공 목서흠의 묘역은 인조 때 한성부 좌우윤을 지냈으며 백성을 위해 교화를 베풀고 청렴했던 목서흠이라는 인물의 묘역으로 서울과의 관련성이 크고, 묘역과 묘역 내 석물들은 조선 후기 묘제 및 석물 제작 양상을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보존가치가 크다. 특히 신도비(神道碑)는 조경(趙絅)의 문장과 이정영(李正英)․조위명(趙威明) 등 당대 명문장가와 명필들의 글씨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자료로 정사(正史)인 실록 등을 보완하는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따라서 목서흠의 묘역과 묘역 내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는 석물들을 신도비와 함께 일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 보존하고, 문화재 보호구역은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조례 시행규칙 제7조(보호물 또는 보호구역의 지정기준) 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가치가 있는 목서흠의 묘역 보호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지역, 즉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의 32,331㎡ 가운데 597.7㎡를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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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과 각석군

도봉서원과 각석군 - 지정번호 : 서울시 기념물 제28호 - 위치 : 도봉구 도봉산길 90 - 지정일 : 2009.10.22.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1574년(선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조선 중종 때 신진 사림(士林) 세력을 배경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실현하고자 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자주 찾던 도봉산 자락에 사당 등을 세워 조광조를 모시고 기린 데서 출발해 1696년(숙종 22)부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위패까지 함께 모시던 서원으로 도봉산 입구 등산길로 오르면 우측 옛 영국사 터에 위치해 있다. 1775년(영조51) 어필사액을 다시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400여 년간 양주, 파주, 포천, 서울지역에 있는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홍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도봉서원이 1871년 훼철되었으며 위패는 땅에 묻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단을 설치하여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 오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중단되었으나 1970년 도봉서원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1971년 복원하여 매년 음력 3월10일(춘향제)과 9월10일(추향제)에 전국 유림 및 지역유지가 모여 전통향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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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 은행나무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 위치 : 서울 도봉구 방학동 546, 546-1, 지정일 : 2013. 3. 28.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번지에 위치한 방학동 은행나무는 그 규모가 크고,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어 1968년 2월 26일 서울특별시 보호수 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본래는 은행나무의 동남쪽 200m 지점 은행나무가 한 그루 더 있어, 이 두 은행나무를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고 하는데 현 기념물 지정 나무는 수나무이며, 암나무는 신동아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었다고 한다.
기존에 관리되고 있었던 서울특별시 보호수 목록은 추정 수령이 880년에 달하고 있으나, 금번 문화재 지정 조사 시 실시한 국립산림과학원의 과학적 수령조사 결과 600년으로 측정되었다. 이는 천연기념물 및 시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수목들과 비교하여도 최고령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의 수령 702년 다음으로 수령이 오래된 것이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외과수술로 줄기는 원형에서 약간 변형되고 가지도 정리되는 등 수관폭 역시 원형과는 같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노거수임에도 불구하고, 수령측정을 위해 채취한 목편 상태를 볼 때 수간 중심부가 부후되지 않아 생장상태가 양호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문화재 보호구역은 문화재 지정가치가 있는 방학동 은행나무의 보호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지역, 즉 도봉구 방학동 546번지 435㎡ 중 285㎡, 546-1번지 1797㎡ 중 126㎡, 565-2번지 739㎡ 중 137㎡, 총 3필지의 548㎡를 지정하여 동 수목의 생육 환경을 보존하도록 하고 있다.

  • 문화재 및 보호구역 지정 도면

    방학동 은행나무(도봉구 방학동 546·546-1)

    문화재 및 보호구역 지정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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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  - 지정번호 : 서울시기념물 제34호 - 위치 : 도봉구 도봉동 산 85번지 - 지정일 : 2013. 7. 18.

이등(李登)(1379~1457년)의 본관은 개성, 아버지는 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 이개(李開), 부인은 태조의 서장녀(序長女) 의령옹주(義寧翁主)이다. 1435년(세종17) 계천군(啓川君)에, 1444년(세종26) 봉헌대부(奉憲大夫)에 봉하여졌으며 1457년(세조3)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의령옹주는 생년은 미상이나 묘표상“成化二年 二月 初一日 禮葬”이라는 문구가 확인되어 그 몰년이 1466년임을 알 수 있다. 슬하에 4남3녀를 두었다.
이등의 묘는 좌향(坐向)은 남향이다. 계체석(階砌石)이 3단 설치되어 있어 묘역은 상계, 중계, 하계로 나누어진다. 봉분은 장방형의 석재를 이용한 방형분(약 4×5m)으로 여말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물은 묘표, 상석, 문인석 2기가 있는데 모두 상계와 중계에 자리하고 있다. 묘표는 하나의 석재로 개석과 비신을 조각하였으며, 개석은 화관석이다. 이등 묘 후면에 방형에 가까운 형태인 산제 제단이 남아 있는데 장방형 형태로 거칠게 다듬은 석재로 4면을 둘러 축조되어 있다. 아래의 의령옹주 묘는 계체석이 1단 설치되어 있으며, 원형의 봉분(지름 약 5m)과 묘표,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의령옹주의 묘표 역시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석은 화관석의 형태로 보이나 그 수법이 섬세하지 않다.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은 관(官)에서 조성한 조선시대 왕실 묘로서 조선 초기 옹주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고, 석물의 품격도 높으며, 전체적으로 원형을 그대로 잘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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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섭제 박종선류 아쟁산조

지정번호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9호 , 소재지 : 도봉구 방학동 , 지정일 : 2009. 3. 5.

아쟁은 국악기중에서 유일한 저음 연악기로 소리를 지속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하여 해금과 더불어 관악합주에 반드시 포함되는 악기이다. 궁중음악에 쓰이는 아쟁을 정악아쟁이라 하고 민속음악에 쓰이는 아쟁을 산조아쟁이라 한다.
아쟁산조 예능보유자인 서울시 무형문화재 박종선은 1941년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에서 태어났으며, 열다섯 살 때부터 한일섭선생에게 가야금과 장구, 아쟁, 태평소를 두루 배웠다. 1958년에 광주국악원을 수료하고 1962년에 전국 국악경연 대회에서 기악부 장원을 했으며 그 이듬 해에 호남 예술제에서 기악부 최고상을 받았다. 1965년부터 광주국악원과 광주시립국악원에서 악기연주를 가르쳤고 국립국악원 민속반에서 수석연주자와 지도위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2001년 국무총리 표창, 2009년 서울전통예술인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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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창 유의호 송서

지정번호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41호, 소재지 : 도봉구 창동, 지정일 : 2009. 3. 5.

‘송서(誦書)’는 글자 그대로 ‘글을 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글방에서 읽는 식과는 달리 멋을 넣어서 읽는 것으로, 전문적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이 예술 활동의 하나로 소리를 하는 전통문화유산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유의호는 충남 서산이 고향이며 1998년 전주대사습 민요부분 장원을 차지하였고, 2000년 전국 경서도창대회 대통령상, 2003년 KBS국악대상 민요상을 수상하였으며, 前 제57호 중요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수조교이고, 제41호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송서 예능보유자이다. 2010년 송서, 율창 보존 및 창작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훈장 화관장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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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사 목조불단

천축사 목조불단  -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6호  - 위치 : 불교중앙박물관 수장고  - 지정일 : 2014.09.25.

천축사 목조불단(天竺寺 木造佛壇)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산 천축사 대웅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배대상인 목조석가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던 대형 불감의 일부로,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014년 9월 25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66호로 지정되었다. 불단의 제작연대와 관련하여 사찰에서는 문정왕후의 하사품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 불단이 찍힌 흑백필름을 보면 불단 위 감실 내부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47호 천축사 목조석가삼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목조석가삼존불상은 복장된 발원문과 1600년 경 간행된 묘법연화경 등에 의해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석가불, 재화갈라보살, 미륵보살임이 밝혀졌으며, 발원문 중 하나를 보면 목조석가삼존불상은 만력연간(1573~1619)에 제작해 1713년 조각승 진열과 영희 등에 의해 경기 고양 북한산 露積寺(현, 천축사)에서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이 불감의 조성연대를 1713년(숙종 39)으로 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나, 대웅전 중수 기록에 의해 후대로 내려갈 수도 있다. 본 유물은 불감 중 상부의 닫집은 제거된 채 하부의 불단 구조만 남아 있지만, 목공예품이 재질의 특성상 보존이 어려워 시대가 올라가는 유물이 많지 않고 조선 후기의 유물조차 거의 없는 상황임을 고려할 때 존재 자체만으로도 목공예사적으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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